Friday, September 29, 2023

느닷없이

 가끔은 '온 세상이 개판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곤 한다. 지나가는 보행기에 들어 앉아 있는 소중한 '댕댕이'를 발견하고는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 아기'가 강아지 대신에 앉아 있으면 놀랄 정도이다. 여름이면 보행기에 휴대형 선풍기를 좌우 양쪽으로 매달아 털옷을 입은 댕댕이님을 시원하게 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애지중지'하는 소중함의 크기에 놀랄 뿐이다.

동네 산책을 나가는 길에 다양한 견주와 다양한 댕댕이와 마주치는 즐거움도 있긴 하다. 견주와 댕댕이가 닮았다는 생각, 그리고 닮아가는 그 그림이 행운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도 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린 품목이 '개옷'이란 것을 발견하고 아들의 댕댕이가 생각이 나서 반가운 마음에 그만 '개옷이다!' 하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개옷' ㅋㅋ 단어를 따라하며 웃프게 웃는다. '왜 웃지?' '개'라는 단어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면 어떤 표현을 해야 되었던 거지? 어감이 더 친근하고 귀여운 '강아지 옷'이라고 하던지 아니면 요즘 신생어인 '댕댕이 옷'이라고 했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개를 개라 하지 뭐라 하지? 개가 새끼를 낳으면? ㅋㅋ'강아지'( 이 사건(?) 후로 그냥 '댕댕이'라 부르고 있다.)

 이쁘고 기쁨을 주는 '애완견'에서 '반려견'의 위치로 올라선 댕댕이들이다.누군가에겐 삶의 활력소가 되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반려자의 의미로 '반려견'으로 지위를 격상한지가 최근 몇년 동안의 변화였지 싶다. 개를 식용으로 먹고 살았던 그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의 반려견의 위치에 올라선 한국에서 개의 위치를 조명하자면 세상이 참으로 급변한 한 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흔히 심히 마음이 상해 욕할 때 쓰는 그런 오래된 관념의 '개'라는 이쁘지 않은 단어를 쓰면 왠지 죄송하고 안되는 분위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큰 아들과 살고 있는 댕댕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말없이 먹을 것만 밝히고 그리 영리하지 않은 댕댕이지만 보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다. ㅋ 거리의 댕댕이들을 만나면 이상하게 '아들의 댕댕이' 생각이 나고 나름 반응을 하고 싶어진다. 그냥 '주책없이' 한마디라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ㅋ

공원에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보곤 하는 과묵한 댕댕이를 알게 되었다.  견주와 댕댕이가 비사교적인 편이라는 것쯤은 알고는 있었기에 댕댕이에 대한 아무런 예(?)도 갖추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과묵한 댕댕이가 '느닷없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크게 짖는다. 지나가던 '귀여운 댕댕이'와 그 견주 그리고 기타 지나가던 행인들이 놀라고 말았다.  '그 개와 그 주인이 똑같다.' 놀라게 했으면 가벼운 목인사라도 하면서 '미안함'을 표시하는 것이 예의이거늘,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견주는 참으로 그야말로 '예'를 모르는 동물수준이라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예'가 있고 없고에서 차이를 분별하자면 말이다. 

뭐지? 놀란 가슴 끌어안고 매너없는 개의 큰짖음의 해석을 하지 않고서는 그 불쾌함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지 싶다.  '내가 제일이야. 까불지마, 이 구역에선 내가 최고여!' 견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무런 사과의 제스처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일까. 너무 사랑스런  '금쪽이 댕댕이님'을 꾸짖을 수 없는 것일까. 

'감사합니다','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불쑥불쑥' 느낄 때도 있다. 세상이 더 팍팍하고 삭막해 가더라도 그렇다고 그 어두운 분위기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예의가 없고 기본 소양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러다 보니 입을 닫고 피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다시 차라리 말없는 댕댕이를 껴안고 살아야 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세상은 개판이 되어 가는 것이다.ㅋ


무심하게

 길을 지나가다 보면, 사람들과 함께 나온 '댕댕이'들을 만나게 된다. 작고 귀여운, 크고 잘생긴, 못생겼지만 구여운, 여우처럼 이쁜, 눈송이처럼 하얀, 털이 짧아 단정한, 등등 다양한 댕댕이들은 마킹을 하든지 혹은 냄새를 맡는 행동을 하든지 혹은 지나가는 댕댕이들에게 반갑다고 혹은 짖는 반응을 격하게 보이기도 한다. 특히 크기가 작은 댕댕이들은 이상하게 사납게 짖어대며 격하고 '적대적인' 반응을 한다. 

크고 듬직한 개들이 오히려 작은 개들의 으르렁거림에 민망하여(?) 놀라 얼른 지나가는 듯 보이기도 하다. 큰 개의 견주들은 이상하게 그 자리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하기도 하다. 큰 개의 '야성'이 깨어나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기도 하다. 동물학적으로 사이즈가 크고 힘이 센 큰 개가 작은 개보다 더 '두려운 존재'임에 틀림없는데, 작은 개들은 이상하게 더 큰 개를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짖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생존본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 싶다. 자신 보다 더 큰 사이즈 상대를 직면했을 때, 감당하기 힘든 어떤 '두려움'이란 것을 울부짖음으로 떨쳐 내려는 시도가 아니겠나 싶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두려운 존재!' 넌 덩치만 큰 댕댕이라고, 난 덩치는 작아도 이빨은 쎄다고, 난 깡밖에 없다고, 난 무설울 것 없는 컴팩트 스타일이라고......작은 댕댕이는 짖는 것을 쉽게 멈추질 않는다. 참 이상하다.

반면, 어느 님의 반려견, 등치가 큰 순둥이 댕댕이는 '무심하게' 지나간다. 그 의젓하고 무심한 뒷 자태를 옮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얼마나 멋진가! 사납게 짖어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자태, 훌륭하다. '뭔 개짖는 소리란가!' ㅋㅋ

Wednesday, September 27, 2023

너그럽게

 '너그럽게'라는 부사는 조금은 어려운 단어이다. 나이가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즐길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거울 앞에 있는 얼굴은 전혀 즐겁지 않은 모습이다.' '아, 늙었구나!' '아등바등' 주름짐을 감추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너그럽게' 자신의 노화를 받아 들여야 한다고 말하곤 가성비 좋은 '착한' 피부과를 검색해 본다. 

지난 봄에 인터넷 댓글을 참고 하여 방문한 피부과 원장님은 참으로 친절하였다. 구체적인 증상 하나만 이야기 했는데 과하게(?) 친절하셨음이다.  고객에게 묻지도 않고 친동생에게 치료를 하듯이 친근하게(?) 하시더니만 결국에 엄청 저렴한(?) 가격이라면서 제시하셨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였지 싶다. 과잉진료 하지 않고 피부질환에 대한 처방만 하신다하여 방문을 했더니만 그 이뻐지는 레이저 시술을 묻지도 않고 들어가고 말았다.  

난 바보다! ㅋㅋ

묻지도 않고 다리 붙잡고 치료 들어가신  의사 선생님과 싸울 수도 없고, 묻지도 않고 다리를 맡긴 내 잘못도 있고해서ㅋ 내겐 부담스럽지만 의사 선생님께는 저렴한(?) 댓가를 지불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지금 내어 놓는 이유는 그땐 하도 어안이 벙벙해서 뭐라 적을 수가 없어서였다. 

결과적으로 시술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봄이 가을로 변한 지금에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가 가진 피부는 그 친절한 의사 선생님의 시술에 개선을 할 수 없는 것으로, 그냥 '너그럽게' 받아 들이고 있는 중이다. 이 경우를 통해서 배운 것은 조금은 수고롭고 까다로워도 '진행 과정'안내하고 고객과 소통을 하여 만족스런 결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이 쌓여 '실력'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 연륜과 명성에 배반되는 안일한 방법을 선택하고 자신의 실수를 감추고 고객의 피부탓을 한단 말인가. 

한참이나, 바보같은 자신을 들들 볶았지 싶다. ㅠ 뭘 그리 이뻐질라고? ㅋㅋ 아냐, 정말이다. 피부 염증이 왜 생겼는지, 그리고 처방전을 받아 오려고 갔을 뿐이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이 혼미하여 그만 정신줄을 챙겼을 땐 이미 의사선생님이 보안경을 쓰고 레이저로 치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아니 되옵니다 할 수 있었을까?ㅋㅋ

인터넷 댓글이 함정이었다. 나름 정보를 입수하고 방문한 것이었는데 더 긴장을 하고 더 날카로워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의사였지만 내겐 아니었다. 

이제, 먼저 '너그럽게' 자신과 화해부터 해야 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다. 이번 극한 여름에도 더 이상 짧은 치마와 바지를 못입게 되었을 뿐이다. 오래전  아담과 이브가 수취심을 느껴 나뭇잎과 가죽으로 감추고 싶은 곳을 가렸듯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가려야 할 곳이 점점 더 늘어났을 뿐이다. 미끈하고 탱탱한 두 다리 내밀고 다니면서 이루어야 할 과업도 없고 그냥 안 아프면 되는 것이려니.그래도 타인의 다리를 힐낏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ㅋㅋ '아직 썽썽허네 ㅋ'

'가슴 설레이는 일'을 찾고 그 과정에서 사고가 확장되고 성숙하며,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멋진 일이다. '자신과 어울리는 옷'을 챙겨 입듯이 더 나은 존재로 나름대로 키워가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뭐가 문제지? 

가끔은 '물질'이 모든 가치와 모든 것을 삼킨다는 생각을 갖곤 한다. 글쓰기도 그렇다. 블러그에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을 기록할 수도 있고, 일상에서 생긴 생활형 상처들을 '쓰담쓰담'하며 자기 치유를 할 수도 있고, 불특정한 생각들을 정리해 볼 수도 있고,  사고가 확장되고 풍성해질 수도 있는 여러 순기능들이 있는데 굳이 '돈돈돈'하며 상업적인 가치로 조회수를 운운하며 블러그에 글을 쓰는 방향을 잡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이왕이면 글도 쓰고 돈도 벌고 하면 '금상첨화'겠지만, 블러그로 돈 벌 생각 하지 않고 그적거릴 정도로 난 돈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ㅋ

나이가 들수록 '품격'과 '체력'의 중요성이 더욱 가치있게 다가오는 요즈음이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처럼 '돈돈돈' 하지 말고, 이번 추석엔  '공공장소'에서 '매너'를 지키며 타인의 영업 방해를 하는 행동을 삼가하고, 외롭다고 아무말이나 쏟아내는 언행을 조심하며, 특히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그리고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되지 말기를 스스로에게 '되새김질'하며 바래본다. 

이번 추석은 '너그럽게 둥근' 보름달을 바라 볼 수 있다한다. 보름달 만세~~~

Tuesday, September 26, 2023

껍데기를 벗고서

 

              '껍데기를 벗고서' ,from 'something like happiness', Mono Print, 2011

해바라기 씨가 어두컴컴한 흙속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먹고서 마침내 '껍데기'를 버리고 일어나는 순간이다.

도서관 앞 붕어빵

 지하철을 내려 집으로 가는 길, 동네 도서관 근처에 자리를 잡은 붕어빵을 파는 작은 트럭 앞을 지나치게 된다. 붕어빵이 구워지는 냄새를 따라 자동적으로 얼굴이 움직여 그 먹음직스런 붕어들을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무서운 '탄수화물'과 '설탕'이 들어있는, 걸려들지 말아야 할 유혹을 지나쳐야 하는 것이다. '오늘 한번만' ㅋ 

차도에 트럭을 정차하고  맛있는 냄새로 사람들을 현혹하게 된 붕어빵 아저씨의 사정은 알지 못한다. 노점상을 관리하는 구청 관리 공무원의 눈을 피해 '차도'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불법적인' 일이지만 늘 그 자리에서 '겉바 촉촉'한 물고기들을 만들어 낸다. 

붕어를 굽는 아저씨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노년'의 얼굴을 가지고 계신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국가 유공자(?')일지도 혹은 '독립군의 자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직업의 선택지가 없음으로 해서 '생계형'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으로,  밀가루 풀물을 붓고 단팥소를 넣어 붕어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철엔  '찰옥수수'가 익는 냄새가 유혹적이었는데, 가을로 접어 드는 시기에 '적절하게' 계절 메뉴로 '붕어빵'을 구워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신다. 소비자 타겟을 정하고,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을 잘 잡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최적화 하느라 나름의 '돈벌이' 연구를 하시고 계시리라 짐작해 본다.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 먹는 '거리' 간식인 붕어빵은 우리 동네에선 단돈 '천원'에 '3개'이다. 붕어빵 아저씨도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지속 가능한' 가격인 '천원에 붕어빵 3개'를 정했을 것이다. 극한 물가에 후들거리는 요즘같은 시절에 '천원에 붕어빵 세개'면 감사할 일이다. 

붕어 모양을 하고 있는 붕어빵은 19세기 말로 추정되는 일본의 도미빵,( 타이야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사람을 따라 들어온 모양이다. 일본의 '도미'가 한국에선 크기를 줄이고 '생활 친근형'인  '붕어'라는 형태로 최적화 한 것으로 보인다. 1950에서 60년대 '밀가루'가 미국에서 수입되면서 지금의 붕어빵의 형태를 갖추며 길거리 국민 간식이 되었다고 한다.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어 붕어 모양으로 구운 '풀빵'으로, 반죽하는 시간과 숙성, 팥을 잘 삶는 기술, 굽는 시간 등에 의해 천차만별의 붕어빵 맛이 나온다고 한다. '겉바촉촉'의 붕어빵은 바삭한 껍질, 쫀득한 속살, 고소하고 달달한 팥소가 특징이다. 우리동네 붕어빵은 약간 미끈거리는 질감에 팥이 고급짐에 미치지 못한 싼맛(?)이 조금 느껴진다.ㅋ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격과 시간을 들여  '국산 팥'으로 '직접' 삶아 만들었을 것 같진 않고, 시중에서 파는 '팥소'를 사용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에서' 사먹는 붕어빵은 맛있다. 뭘 바라는가. 영양을 보충하려고 사먹는 것 아니고, 그냥 고소하고 따뜻한 붕어를 먹는 것 아닌가. 붕어 모양이지만 비린내는 전혀 없다.ㅋ

미국에서 살던 시절, 한인 마트 사장님이 '군고구마'와 '붕어빵' 판매를 위해 아이디어를 짜고 계셨는데 미국 동네에서 글로벌적으로 최적화를 하셨는지 새삼 궁금하기도 하다. 오래전에 붕어빵을 먹는 방법에 의해 심리 테스트를 하고 성격의 경향을 이야기 했던 것 같다. 

머리부터, 배쪽 부분부터, 등 지느러미부터, 꼬리부터, 반으로 쪼개서 머리부터, 반으로 쪼개서 꼬리부터? 난 아무생각 없이 붕어를 잡고 머리부터 먹는 거 같은데, '머리부터 먹는 당신은 낙천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고집에 세군요.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하고 싶은 일은 그 자리에서 다 끝내야 하고 뒤끝이 없다.' 게다가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바로 말해 버리는 직설적인 성격이며 화도 잘 내는 성격 하지만 리더십이 강하고 화도 금방 풀어지는 타입이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보다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ㅋ입에 다 먹는 사람은?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란다.' ㅋㅋㅋ-인터넷에서 퍼온 글

붕어빵을 먹는 방법으로 성격 경향을 추리하다니 뭐 그리 엉뚱한 분석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현실은 이렇다. '낙천적이고 열린 성격'은 진행형 희망사항이고, 세상을 경쟁심을 불태우며 이기고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과 때때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지혜를 터득하였고, 사실, 살아가는 것은 '게임'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사람이기도 하다. 삶은 내가 선택하고 혹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여정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살다보니,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균형을 잡고 살아야 하기도 하고, 나이를 먹은 체력과 정신력이 '젊은 날'처럼 정열적이며 치열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기 보다는 꿀꺽 삼키는 '하지 않은 말'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바로 '즉흥적'으로 '직설적으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다보면 사회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었음이기도 하다.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화를 내는 모습은 결국 두고두고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도 살아온 경험들이 가르쳐 주었기에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되고 싶지 않다. 그냥 귀찮아서, 피곤해서 화도 잘 안낸다. ㅋ  나 자신도 앞으로 끌고 나가기 벅찬 나이에 무슨 리더십인가 하노라.ㅋ 그리고 앞끝 뒷끝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조심하길 바란다.ㅋ

삶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함부러 타인들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재단'하지도 말고 '판단'하는 행위를 조심해야 한다. 붕어빵 머리부터 먹었다고 그런 사람이라고 단정할 일 아니라는 것이다. 더 겸손하게, 더 열린 마음으로, 타인들과 소통하고 '선한 영향력' 주고 받으면 즐겁지 아니한가.

어쨋든, '천원'에 '붕어빵 3개'는 기쁨이다. 붕어빵 아저씨 화이팅!

Sunday, September 24, 2023

그럴 수도 있겠다

 동네 공원에서 옛날엔 유명세를 날렸고 지금은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가수들이 나오는 공연을 보게 되었다. 성능이 탁월한 스피커는 하루 종일 리허설 연습을 생중계하며 온 동네에 '축제'라는 것을 알리는 듯 하였다. 밤 하늘에 떠있는 달은 칼로 '뚝' 잘라 놓은 듯 반달의 모습이지만 이미 축제는 보름달 잔치다. '추석 명절'을 앞에 두고 지역구에서 중점 특화된 문화행사를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는, '시민 친화형'으로 나름 마련하였다고 한다. 

구름이 아직 차오르지도 않은 반달을 가린 밤이지만,  아득하게 흘러간 옛 노래를 들으며 타인들과 어울려 공감하고 함께 감동을 받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집을 나섰나 보다.  잘 생기고 노래 실력이 좋은 가수로 이름이 있는 젊은(?) 가수가 노래를 하니 젊은 팬들이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가 뜨겁다. 높은 명성에 맞게 그의 노래는 통 기타 하나로도  멋졌지 싶다. 젊다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진정 노래를 잘한 탓인가. 청중을 빨아들이는 흡수력이 대단했지 싶다.  

하필 그 젊은 남자 가수 뒤로 나이 지긋한 여 가수가 등장을 하였다.  추석 명절을 앞둔 무대에 와서, 너무나 낭만적으로 너무 슬픈 노래를 굳이 불러야 하는 사연이 무엇이었을까. 구름도 없는 가을 밤에 울려 퍼지는 나이든 여 가수의 노래는 슬프다. 사람들이 축제의 들뜬 분위기를 가라 앉히지 않으려고 저마다 박수를 치며 젊었던 날들과 어린 날들을 추억하며 호응하려 애를 쓴다. 

목소리 높여 소리를 지르고 응원한다고 했는데도 분위기는 뜨겁지 않다. 마침내 그녀를 대표하는 노래가 나오자 이상하게 '안도감'을 느끼고 말았다. 힘껏 환호를 하고 '앵콜'까지 외쳤는데..... 그녀의 노래가 끝나고, 무대 총괄 지휘를 한다는 다음 가수로부터 청중들은 '꾸중'을 들었다. '누구는(젊은 가수) '앵콜'하고 누구는 '앵콜'을 하지 않냐'는 말에 아무리 '배려'를 한 말이라해도 책임있어 보이는 사람의 멘트치곤 유치하고 그리고 열심히 호응한 관람자들을 '멍'찌게 만들었지 싶다.

품격도 없고 흥도 없는 분위기?

쇼가 끝난 후,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와 '앵콜'소리가 가을 밤을 찌르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다.  가수의 무대가 끝나고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멋진 반응이지만 그렇다고 굳이 지적질을 하며 청중을 꾸지람까지 하는 것을 '애교(?)'라고 받아줘야 되는 것인가. 나이가 지긋하고 어떤 감투를 쓰면 청중에게  '잔소리'를 해도 되는 모양이다. 그려, 그럴 수도 있겠다. 

가을 밤 기운을 빌려 있는 힘을 다해  '앵콜'하고 싶은  들뜬 마음이 갈 곳을 순간 잃었지 싶다.굳이 '무료 관람'이라고 생색을 내고,  대신 박수 잘 치라고 하는 노골적인(?) 멘트도 기분이 불쾌했지 싶다. 시에서 적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가수를 초청하여, 시민들이 모여 무대를 함께 즐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무대를 바라보는 청중들에게 관람료를 운운하며 박수치라고 유도하는 과정은 거슬렸지 싶다. '돈 내서 박수 안치는 것 아니고, 돈 안내서 박수 치는 것 아니다.' 

'열린 무대'이다 보니, 술을 걸친 어르신들이 쇼를 매끄럽게 운영하는 것을 방해를 한 모양이다. 청중이 다 듣고 있는 마이크에 입을 대고 경찰을 부르겠노라 협박하고 웃고, 공권력이 투입되는 쇼로 기억되겠다는 등 웃음거리로 승화하고, '막걸리 3병' 가지고 와서 입을 막아 버리라는 말을 온 청중이 듣도록 서스럼없이 하는 과정은 웃기면서도 슬펐지 싶다. 지역 축제이다 보니 음주 청중들이 있을 것이고 미리 사전에 대책을 세우고 매끄럽게 끌고 나가면 될 것을 굳이 축제에 온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한단 말인가. 

노래를 불러야 할 가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려......'

그래도 감사하고 싶은 것은, 나의 묵은 마음이 '모처럼' 시원하고 칼칼한 묵은 노래에 힘껏 소리를 내어 가을 밤을 '실컷' 가득히 '낭만'을 채웠음이다. 



Saturday, September 23, 2023

선물 찾기

 하늘은 푸르고 흰 구름이 둥실 떠있는 전형적인 가을 날이다. 극한 여름을 보낸 후라 이 청명한 가을 날이 '선물'을 받은 것처럼 행복하다. 찜통 더위가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날'의 가치를 알게 되었을까만은, 날씨님이 좋으니 덩달아 기분이 맑아지며 하늘처럼 드높아진다는 것이다.

사용 기한이 임박한 별다방 쿠폰을 사용하기 좋은 날이다 싶어, 아직 읽지 못한 책과 돋보기를 챙기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카페에서 몇 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런 작업을 하기엔 별다방의 에어컨 바람은 치밀한 의도(?)를 의심할 정도로 너무 시원했다. 걸치고 나간 옷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냉방 온도는 '냉방병'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지 싶다. 할 수 없이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따뜻한 거리로 나가 '도시의 가을 풍경'을 누리기로 계획을 바꾸게 되었다. 

밖으로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가을 축제 행사가 열리는 거리로 나와 있었다. 여기저기 축제에 대한 현수막이 걸려있고,  무대와 조명이 설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출연자들이 환복을 할 수 있고 대기할 수 있는 텐트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에 '축제'의 규모를 엿볼 수 있었지 싶다. 반짝이는 한복을 입고 무대 화장을 진하게한  나이 지긋한 출연자들이 분주하다. 추석 명절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풍물놀이' 행사에 참여 하는 분들로 짐작이 가는 차림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습'하고 다듬고 하였을까나.' 팀원들 간에 화합이 하루 이틀만에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조화로운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란 싯구처럼 함께 하는 여정속에 만났을 벼락과 번개를 맞기도 하고 자신들의 한계를 이겨내며 '지금 여기'까지 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사회라는 무대에서 밖으로 밀려나는 것일진데, 지치지 않고 그리고 내려놓지 않고 열심을 다해 열정을 불태우며 앞으로 정진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 진한 무대 화장이 전혀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별다방 에어컨 바람이 심하게 차갑지만 않았으면 좋은 볼거리를 놓칠 뻔 했다. 지역 사회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러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풍경은 아마 오랫만에 보게 된 것 같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혹자는 사랑하는 강아지를 데리고 깽과리와 장구와 북소리가 어울리는 어느 좋은 가을 날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즐거움으로 들뜬 사람들 사이로 걷고 있자니, 막걸리 한잔을 걸친 붉은 얼굴의 사람들이 깽과리와 장구 그리고 태평소(날라리)나팔로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흥판을 벌리고 있다. 프로다운 '희귀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아주 서민적이고 평범하고 보통적인 모습으로, 누가 보든지 말든지 '그냥' 자신들의 '흥'을 이기지 못하고 벌리는 판은 인상적이었지 싶다. 

빛나는 조명과 올려다 보이는 무대는 경력이 화려하고 유능한 젊은 사람들 차지가 되어 큰 스피커 소리로 꽝꽝거리는 것과 달리,  자신들이 있는 길거리 한 구석에서 (지칠 것도 같은데 알딸한 술기운에 더 힘을 낸것인지) 얼굴이 붉어져 터질 정도로 숨을 참고 있는 힘껏 나팔을 부는 모습에 눈물이 '핑'돌고 말았다.

 '라이브란 이런 것이다!'

아무리 멈칫거리는 가을이라고 해도 마침내 어김없이 오고야 말았다. '행복도 하나의 '발견'이다'라는 어느 님의 글귀가 생각이 나는 오늘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란 여정속에 선택했던(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모든 것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앞면과 뒷면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긍정적으로 때로는 창의적으로 '선물'을 찾아내기를 포기하지 말기를 이 맑고 푸르른 날에 셀프로 부탁해 본다. 

Thursday, September 21, 2023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가을이다~~~ 아주 늦은 걸음으로 살포시 가을비가 내리더니 그야말로 '가을'이 되었다. 바삐 돌아가는 '선풍기'를 켜지 않으니 도시의 소리가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선선하다 못해 걸칠 옷을 챙겨야 할 정도이다.

출근하지 아침 동안에 모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비비안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The Situation and the Story)'란 책을 읽어야 하는 숙제가 있다. 마트에 가서 장도 봐야 하고, 밀린 집안 일도 해야 하고, 화분 물받이 물도 버려야 하고, 가을 옷도 챙겨 봐야 하고, 밀린 신문도 읽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상황과 경우에 따라 사실을 바라 보는 '진실'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다.

'둘 사이에서 진실이란 어느 한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저 바깥에 있는 것'('생텍쥐페리')

가끔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거리를 만들어 '객관화' 시킬 필요가 있다. 


 집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생겨서 좋기도 하다. 뭔가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기도 해서 유튜브에서 저명한 교수님의 '사람들의 심리'에 관한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자기애'가 커다란 사람과 '나르시스트'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한다. 생활밀착형 나르시스트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 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혹시 나는? 자기검검 들어갔지 싶다. 혹시 나는 누구를 '유령' '들러리'를 만들지 않았을까.

 '자기애'와 달리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때때로 불쾌한 일이다. 상대방에게  '말'을 할 수도 없고 통하지도 않을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기 위해' '소통'과 '상호존중'이란 것이 없고 '타인의 감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나르시스트'라고 한다. 나르시트가 주변에 있으면 위험한 이유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옆에 두고 좋은 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고 깍아내린다는 것이다. ㅋ '지만 잘나 보일라고'ㅋㅋ

자신만 돋보이고 '주변 사람을 후지게 만드는 사람'이 주변에 있거들랑 그 사람은 '나르시스트'로 위험한 인물이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나르시스가 무서운 이유는 '생활밀착형'으로  착하게, 상냥하게, 그리고 '은근하게' 사람을 심리적으로 괴롭히고 조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긴가민가' 헷갈리게 말이다.

 본인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과대망상'을 가지고 있기에 특권의식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행동을 서슴없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거리낌없이 저지른다고 한다.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조건 일을 추진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와중에 다른 사람의 정신적 피해와 상관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일을 추진한단다. 그 결과 주변 사람들을 '들러리' 삼고도 하나의 '부끄러움'을 못느낀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속에선 주인공이다. 함께 어울려 살려면 서로를 살펴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이런 나르시스트 만나면 처음엔 긴가민가 그 존재의 정체감을 몰라 당황하겠지만 지켜보면 그 말과 행동, 특히 행동을 살피면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타인의  상처를 입었을지,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생각하고 배려할 능력이 없는 사람때문에 힘들 필요없다. 

전문가들이 추천한 방법은 엮이지 않고 공감해 주지 않는 '회색돌 기법'이 있다 한다. 애매하고 어중간~한 표정과 말투로  멍~ 멍~멍~ 멍한 캐릭터로 나르시트의 날뛰는기운을 완화할 수 있다고 하니 참고 바란다.  혹시 나도 나르시스트? 나도 누군가를 '들러리'로 만든 것 같은데......

Wednesday, September 20, 2023

감고 감고

 가끔은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할 때가 있다. 요 며칠이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러그에 '아무 이야기'라도 그적거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내 정원에 바람을 타고 씨 뿌려진 무성한 잡초가 나의 소중한 꽃들을 덮어버린 느낌이 들었던 것은 잡초탓이 아니고 나의 꽃들이 '강'하지 못했음이란 것을 아침 길의 '푸른 나팔꽃'을 보며 깨달았다. 

아침 출근 길에 만난 푸른 나팔꽃은 '가시'가  많은 장미 줄기를 감고 올라, 작은 목소리로 함께 아침 나팔을 부지런히 불고 있는 것이다. 주저앉아 있는 나의 핑계는 부끄러웠지 싶다. '드센 가시'가 있는 상황'이라고 머뭇거리지 않고, 어리디 어린 더듬이로 '감고 감고' 올라가 꽃을 피우는 푸른 나팔꽃은 오늘 아침 내게 고마운 스승님이었지 싶다.



                                                                        

떠나는 기차는 쿨하게 보내기

아침 출근 길에 '떠나는 기차는 쿨하게 보내기'라는 안전 문자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곤 한다. 아침을 먹은 '힘'을 다해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던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계단을 내리 달려' 빨리 빨리' '후다닥 후다닥' 그래도 속도를 내어 달리는 '지하철'에 설치된 자동문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곤, 들고 있는 우산을 '희생양' 삼아 닫히는 문에 넣어 본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ㅋㅋ 자동문이 어떤 물체가 근접하면 자동으로 열리듯이 우산을 문 안쪽으로 집어 넣으면 열릴 줄 알았다. ㅋㅋ 그런데 문이 열리기는 커녕 우산이 잡혀 찌그러지는 것이다. 정말 놀랬다. 얼굴이라도 집어 넣었더라면?ㅠㅠ

 우산 끝으로 느꼈던, 지하철 문의 닫히는 강력한 힘에 '찌그러진 얼굴'이 안전문자와 함께 걸려있다. 나의 모질하고도 아찔한 모습이 떠올라 웃고 말았지만 사실 '심각한' 일 아닌가! 출근길에 무심코 저지를 수 있는 '사고'의 위험을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이 이제서야 보였나 보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기다려 환승을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늘 숙지해야 할 것은 '안전'이라는 사실은 늘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떠나는 기차 뒤로 또 다시 기차가 온다. 다시 지하철 문이 열리고 타면 되는 것이다. 

 

Tuesday, September 19, 2023

내안에 이웃이 있다고?

 생각이 온통 못된 이웃에게 꽂히니 불행한 느낌이 드는 아침이다. 이른 새벽에 모든 움직임을 끝낸듯이 조용한 이 아침은 이웃의 밤인가 보다.  저 양심 없는 무례한 '이웃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자비심' 보다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오른다. 관리실에 신고를 해서 하나마나한 알림장을 벽에 붙이는 것도 그리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비싼(?) 안마기를 사다주며 잠좀 자자 할 수도 없고, 눈물 뚝뚝 떨어지는 손편지를 써줄 수 없다는 것이다.

말이 쉬어서 '원만한 해결'이다. 

새로 이사와서 알게된 '소음'에 관해, 관리실에 전화를 하고 관리를 부탁했지만 알림장이 엘리베이터에 붙었을 뿐이다. 알림장 하나에 조심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절대 아니라고 억울해 하며 고통당하는 이웃의 '민감함'을 부각시키지 않던가.  나름 합리적인 수집 근거를 갖고 이야기를 했더니 '어떻게 자신들이 소리냈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던 사람들이다.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정신적 피해까지 증명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노력을 하여 증빙을 한다한들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가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하고 힘은 힘대로 빠져서 결국엔 지쳐 이사를 가야 하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비가 오는 수요일이다. 

타인이 자극하긴 했지만, 부정적인 틀 안에 갖힌 느낌이다. 비가 오니 그야말로 마음을 식히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지만 자꾸 생각이 못된 에너지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그래, 오늘 아침 지금 당장은 툴툴 털어 버리자. 밤 중 내내 소리내는 것 아니니 틈 사이로 잠을 자는 것이다. 빗 사이로 통과해서 걸어가는 것처럼.  수면의 질을 높인 짧은 잠을 자는 방법을 모색하고,이웃이 만드는 기상 소음에 '반갑게' 일어나 글을 쓴다든지 작품을 한다든지 긍정적으로 '승화'를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꾸역꾸역' 긍정적인 생각을 머리 속으로 집어 넣어 본다.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자와 말을 섞을 필요도 없고 '손편지'를 쓸 필요는 전혀 없다. 똥이다! 얼른 도망가야 한다. 똥밭에서 굴러봤자, 나도 똥이 되는 것이려니.....

Monday, September 18, 2023

다다다다 다다이즘

 선풍기를 돌리며 아침을 시작했던 월요일이 가고, 다시 선풍기를 돌리는 화요일이 되었다. 며칠간(?) '잠'이 부족한 상태로 그런대로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급기야 이번엔 출근 필수 용품인 '시계'를 차는 것을 깜빡하곤 자신을 염려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멍'한 상태로 '집중력'이 탈출하는 경험은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듯 하여 불안의 색이 짙어지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불안감'은 불쾌한 이웃때문이다. 보통적인 사람들이 잠들어야 할 시간에 이웃은 상관이 전혀 없다는 듯이 '다다닥'거리며 새벽에 소음을 만든다. '무슨 사정이 있나보다'며 그냥 접수하자며 살고 있는 중이다. 애초에 보통 상식이 있고, 기본 예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웃에게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경'을 둔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게 침범해 들어오는 이웃의 소리는 여전히 불쾌하다. 한번 잠이 깬 새벽은 불행하다. '민감한 내탓이요, 똥을 피해 도망가지 못한 내탓이로다!!!''

느닷없이 잠을 깨면 어김없이 잠이 짤린 새벽 시간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웃이 만드는 생활소음을 듣고 있자니 공포 영화의 서막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갈등의 씨앗이 여물어 가는 소리...... 한동안  불쾌한 소음도 귀에 굳은 살이 생겼는지 그런대로 적응을 한 것 같았는데......

다다닥 다다닥 다다다다 다 다 다다 다다닥 다다닥....다..다...다닥 다 닥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수동 안마기 소리'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운동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몸이 쑤시고 심하게 아픈 모양이다. 너무 아파서 타인을 배려할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미끼를 매일 밤 던지며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사이코처럼 일부러 소리를 낸다.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새벽이면 두들기는 소리를 내고 낮이면 조용하단 말인가. 어디가 심하게 아픈 것일까? 저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의 사정은 무엇일까?

 가끔은 '사악하게' 이웃은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듯하다. 일부러 소리를 내는 것처럼 하나의 양심도 없는 사람처럼 타인의 잠을 방해한다. 소리는 소리인데 그만 심리적 감정적인 소리로 미친 자극을 한다. 공포 영화처럼 나 또한 흑화되어 반응하고 싶어진다. 화가 나도 보복 행위는 금물이란다. ㅠㅠ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다한다. '객관적인 증거를 갖기 위해서 '소음 측정기' 등 기기를 이용해 시간대별로 데시벨을 측정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당시 상황을 녹음 및 촬영해 수집한 증거로 추후 분쟁에 대비하면 된다'고 한다. 

잠 안자고 연장들을 준비해 이웃의 소음을 녹음하고 앉아있을 생각을 하니 더 심란하다. ㅠ


Saturday, September 16, 2023

기억이란 해석이다

 어라, 에어컨을 켜지 않고도 그야말로 적당한 아침이잖는가. 창문을 열고나니 선풍기를 켜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늦은 걸음으로 오는 가을이 바로 창문밖에 도착한 모양이다. 

창문을 열고 뜨끈한 찌개를 끓여도 괜찮은 날이다. 이때다 싶어, 냉동고를 털고 냉장고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야채들을 동원하여  된장찌개를 끓이니 온 집안에 구수한 한국의 향기(?)가 퍼진다. 친정엄마 된장국은 정말 맛있었는데...왜 나의 된장찌개는 그런 맛이 안날까 묻다가 엄마표 맛이 난다는 조미액을 첨가하고 만다.ㅋ 그래도 그맛은 아니다.

'주렁주렁' 푸른 대추 열매가 달린  대추나무 가지가 밑으로 휘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며 시간의 무게를 벗어날 수 없음을 생각한다. 아파트 정원수로 심어진 대추나무에서 푸른 대추들이 푸르다 못해 익어가는 모습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라,  대추맛을 아는 누군가는 부끄럼없이(?) 긴 막대기를 들고 대추나무를 흔들어댄다. '푸른 대추'는 피로회복에 좋다는 비타민 C가 풍부하고 게다가 '붉은 대추'는 신경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는 것쯤은 알고는 있지만 나에겐 '긴 막대기'도 없고 대추 나무를 흔들어댈 '용감함'(?)이 없다. 

그래서 대신에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로 그 보암지고 하고 먹음직도 한 '대추'에 대한 미련을 대신하고자 한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도로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가 차들이 뿜은 매연에 힘들었는지 유난히도 일찍 열매를 떨어뜨린다. 은행나무도 환경호르몬으로 '조숙'하게 된 것일까. 아직 나뭇잎들은 푸르고 그 황금색 잎으로 변하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열매들을 떨구어낸단 말인가.

사람들이 밟으면 냄새나는 '은행알'을 요리조리 피해서  걷느라 분주하다. 은행나무는 이미 가을을 시작한 것이다. 

저녁에 비가 온다하여 오후에 서둘러 동네 공원을 나갔더니, 코스모스가 '한들한들'거린다. 정성들여 관리하지 않은 공원답게 숱한 잡초들과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혼잡한 상황에서도 코스모스가 그래도 가을이라고 투덜대지 않고 때를 알아 피어나는 것을 보고 '우주'가 코스모스 꽃 안에 들어있다는 시적인(?) 생각을 하였다. ㅋ 너무 거창한 시적인(?)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을 보니 바람 부는 가을이 된 모양이다. 


Friday, September 15, 2023

'미'치지 못함으로

 




눈도 침침하고 해서
의자에 앉으면 배도 나오고 해서
집안 일도 해야 해서
아침 신문도 읽거야 해서.......
숱한 핑계를 꺼내들고 
보통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선택했다면,
더 이상 '미'치지 못한 것이다.

'미'치지 못함으로 
'예술'이란 이름이 두렵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쏟아 내었던 모든 것이
허허로워서
그래도 가끔은 
침침한 눈에 돋보기를 걸치고 들여다 본다.

치열하지 못해
감당하지 못해
내려 놓았던 '모든 것들은' 아름다웠다.

Thursday, September 14, 2023

호호호호 호박꽃

 

   

                                          비오는 금요일이라서
                                          호박전이 땡기는데......                                          

                                       

당황하지 않고

  가을 햇살이 맑은 날엔 창문과 방충망까지 열고 침구류를 말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나의 시간과 햇님의 무드가 적당하면 무슨 오래된 낭만적인 풍경이라도 만드는 것처럼 창문을 열고 이불을 널고 싶다. 지금은 창문을 열고 이불을 말리면  도시 미관상 좋지 않다고 해서 쉽게 행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햇살의 강도가 저항할 수 없이 유혹적인 날엔 할 수 없이 이기적으로다가 방충망까지 열어가며 감행을 하게된다. ㅋ 햇님의 기운을 이불에 받으면 그날은 신기하게도 잠이 잘온다는 것이다. ㅋ 그러나 관리실에서 따끔한 전화가 오기 전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날개를 가진 뚱땡이 검은 파리가 들어와 웽웽거리며 먼저 나의 이기적인 선택에 대한 괴롭힘을 준다는 것이다.

방충망이 열려 있는 상태를 어찌알고 '귀신처럼' 들어온 검은 '파리'가 이상하게 '어리둥절' '혼미백산' 정신이 없다. 그 당황한(?) 날개짓은 집의 절대자 인간인 '나'에게 들켜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때,

 파리를 때려 참혹하게 처형할 수 있는 파리채가 있어도, 독한 약물을 뿌려 숨막히게 할 수 잇는 방충 스프레이가 있어도 살겠다고 용감하게 들어온 파리를 그냥 집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내손에 '파리'의 피를 묻히고 싶지도 않기도 하여, 모든 창문과 대문을 열고 '친절한 안내'를 해본다. '당황한' 파리는 나의 친절한 인기척에 더 허둥대다 결국엔 삶의 의지를 꺽은 것처럼 어느 구석진 곳으로 숨어 침묵해 버린다. 결국 빠져 나갈 수 있는 모든 창문과 대문이 닫혀버리고 시간이 흐른다.

며칠 지나 청소를 하다 파리의 죽음을 쓸어담으며, 자신을 둘러싼 닫힌 벽과 열린 문을 구별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를 본다. 파리의 운명이었을까? 본능적으로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그 먹음직스런 냄새를 따르는 본능에 충실하였으나, 갇힌 벽으로 둘러쌓여 있는 '유혹'으로부터 탈출하는 법을 알지 못했음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았음이다. 분명 열린 창과 열린 문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침 출근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절대 필요한 스마트폰을 챙기지 않았음을 인지하였다. 지하철은 이미 달리고 시간은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감당해야 했던 것은 '당황함'이었지 싶다.  출근 시간에 지각이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잘 챙긴다고 챙겼는데, 자신의 대한 의심이 그 짧은 순간에도 밀려 들어왔지 싶다. 

달리고 있는 지하철에서 내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스마트 폰을 챙기면 되는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가방을 열어 찾아보니, 가방안에 스마트폰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적응력과 융통성이 결여되가고 있지 않나 자기점검 들어간다. 대체방안도 있었을 것인데 왜 그리도 혼미백산한 파리처럼 마음이 어지럽단 말인가.

오만과 교만을 경계하지만, 먼저 자신을 믿어야 한다.


여름의 끝을 잡고

 


아침햇살을 받아 행복해 하는 해바라기들을 스마트 폰으로 찍어 보았으나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갖고 말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간을 들여 올려본다. 오랜만에 디지털 작업을 하니 서툴기 그지 없다. 


호박꽃을 찍어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호박꽃은 이상하게(?) 사진발(?)이 없다. 호박 꽃도 꽃이냐고 아직도 묻는 사람이 있다면, 호박꽃은 분명 꽃이다. 비닐 하우스 지붕위를 뒤덮은 소박하지만 정열적인 주황색 호박꽃을 찍으려면 낙하 위험이 있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거나 비싼 '드론'을 이용해서 찍어야 할 모양이다.  '시간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가치가 상승한다'는 '늙은 호박'은 아침 출근 길 지나치는 도시 농부의 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 열매가 생기면 생긴대로 따서 애호박전을 해먹을까. 아니면 무성한 호박잎에 숨어서 크기를 키우고 있을까. 여름의 끝을 잡고 부지런히 꽃을 피우는 호박은 부지런하다. 

'늙은 호박'은 '베타카로틴' 함유량이 '단호박'이나 '붉은 파프리카' 보다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칼륨'과 불안감 완화에 좋은 '글루탐산'도 들어있는 훌륭한 식품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혈전'이 생성되는 것을 막아 '심근경색'의 위험도를 낮추어진다고 하니, 노후하고 빈약한 혈관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가까이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호박씨 심은 곳에 호박이 자라고 그 넝쿨이 부지런하게 막무가내 최선을 다해 뻗어나가 꽃을 희망처럼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순박하고 겸손한 주황색 호박꽃을 바라보면서 분명 누군가 '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검색을 해보니 시인 '안도현(1961-)'님의 재미있는 '동시'가 있어서 올려본다. 

호호호호 호박꽃
호박꽃을 따버리면
애애애애 애호박
애호박이 안 열려
호호호호 호박전
호박전을 못 먹어
               '안도현' 시인의 '호박꽃'(동시)



Wednesday, September 13, 2023

가을을 부르는 비

 어제의 시간은 맑고 뜨거웠기에 오늘의 비가 느닷없이 갑작스럽다. 어제의 뜨거워진 몸과 마음을 식히라고(?) '천천히 천천히' 부드럽게 내리고 있나보다. 아주 조심스럽게 내리는 비는 분명 '가을비'가 그치고 나면 그 불분명했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비오는 출근 길을 위해, 더 간소한 옷차림과 방수 등산 신발을 신고 집밖으로 등정을 나가니 온 세상이 내리는 비에 증기를 내뿜는 듯 하다. 아침 단장을 하고 나온 사람들은 다들 잠을 잘 주무셨을까. 환절기에 접어든 탓인지, 무더운 여름을 보낸 탓인지,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도 가을을 타는 사람처럼 '전전반측'의 밤을 보낸다.   

'나라 살림이 힘들다'고 하더니, 동네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는 노인 일자리가 정지를 당한 모양이다. 슬럼가의 한 풍경처럼 쓰레기들이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애써 못본 척 한다. 키가 큰 푸르디 푸른 나무들로 시선을 옮겨 버린다. 아침부터 기분이 오염되기 전에 얼른 도망가는 방법 밖에 없다. 사람들이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여 길을 횡단하여 건너니 뒷따르던 자신도 자동적으로(?)따라 건너고 말았다. 그야말로 '살짝' 고민하고는 '그러면 어때'하고 사람들 뒤를 따라 건너고 나서 '죄'를 지었다는 생각과 안전에 대한 우려가 섞인 '후회'를 한다. 

왜 자꾸 규범을 지키고 소신을 따르지 않고 '둘레둘레' 주변 사람들을 따라하는 것이지?. 보통 사람들은 '보통'이라는 범주에 들어가기 위한 보통적인 행동을 선택하고 보통적인지 체크한다고 한다.  다수를 차지하는 보통에서 어긋나면 이상한(?) 사람이 되면 불편하거나 불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가 보이지 않으면 무단횡단을 따라하는 나는 보통 사람인가.' 급히 앞사람의 뒤를 따라 길을 무단횡단의 결과로 몇분을 아끼고 소중하게 사용한 것일까 묻는다. '다시는 이래서는 아니 된다'고 스스로를 꾸짖어 본다. 그냥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무책임한 행동을 한 것이다. 사고가 나면 앞사람 따라가서 그랬다고 남탓을 할겨? 잠을 설친 이유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다 잠때문이다!!

무단횡단까지 하고 지하철 승강장에 도착했더니만, 지하철이 무심하게 바로 앞에서 문을 닫고 가버린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미끄러지듯이 무리해서라도 타고 싶었지만 이번엔 참았다. '다시 지하철이 또 올 것이다!''무엇보다 안전이 제일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걷거나 뛰지 말라'는 안전 글귀가 붙어 있지만, 사람들은 두 줄로 서서 왼쪽은 지나 가고 오른 쪽은 움직이지 않는다. 새로 바뀐 규정엔 한줄로 서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폭이 아주 좁아 지나가기 위험하고 경사가 아주 높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두줄로의 적절한 습관을 버리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나 또한 고민되지만 에스칼레이터 가드를 붙잡고 걸어 올라가며 출근 길 '순환'을 눈치껏 돕는 편이다. 그래도 경각심을 갖고 행동해야 할 선택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아직 마스크를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지하철 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숨막히는 마스크를 벗고 내게 필요한 것은 ' 맑은 공기'이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타인이 내뿜는 으슥한 허연  담배 연기가 침범해 들어오며 '좋은 아침'을 망치려고 한다. 비오는 날이라 담배연기가 더 맡아졌나 보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나 보다' 어차피 아침 출근길의 자동차들로 부터 나오는 매연 때문에 마스크를 쓰긴 해야 한다.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었던 마스크를 꺼내어 쓰고 만다. '어릴 적 울 아버지 담배 냄새를 좋아했었는데...ㅋ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아니다.'  

정거장에 앉아 더디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땀을 느끼고 있자니, 어느 시인의 싯구처럼 뜨거워진 얼굴과 뜨거워진 마음을 식히라고 가을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나 보다.

Monday, September 11, 2023

꼬치꼬치

 '꼬치꼬치' 캐 물으면 어느 님이 좋아 할까. 아침 신문에서 저명한 의사 선생님께서 '건강 관리'의 조언을 하시길,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담당 의사 선생님께 꼬치꼬치 질문을 하여 잘 관리를 할 것을 권하셨다. 바쁘신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 '꼬치꼬치' 물을 수 있다는 것인가. 현실에서 상당히 실천하기 어려운 주문이라며 나의 경험치는 부정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 의료 보험의 단점은 의사 선생님과 환자와의 소통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별히 많은 환자가 대기하고 있는 경우라면, 어떻게 이기적으로다가 무슨 늘어지는 질문을 꼬치꼬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름이 있을수록 환자들은 많고, 그 많은 환자들을 당일 다 대면하고 치료 처방을 하기 위해서는 예약이란 것을 하지만 예약과 상관없이 항상 병원은 바쁘다는 것이다.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가끔 묻곤 한다. '이렇게 한참이나 기다리고 금방 문열고 문닫고 끝날 것이면 왜 예약이란 것을 하지?'

병원을 방문 하기전에  질문지를 만들어 보았지만 바뻐 보이는 의사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보통적으로 5분도 안되는 시간이었지 싶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차트를 체크하고 그리고 처방전을 쓰고...질문 들어가 좀 길어지면 금새 간호사가 들어와 재촉하는 듯 다른 사람의 차트를 놓으며 다음이 밀려있음을 몸짓으로 알린다. 

심지어 병원 문앞에 '병명을 이야기 하지 말고 증상만 말하시요.'라는 말을 붙여 놓는 곳도 있었다. 스마트한 세상에 살고 있어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한 '잡사'들이 많은 탓이리라는 짐작이 간다.  확인되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 근거로 아는 척 하는 것에 일일이 수정하고 교육 시키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이면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왠지 너무 똑똑해서 인정머리가 없는 그 문장에 말문이 그냥 막혀 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이 정확한 질문과 정확한 답변이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언어 구사력이 부족해서 증세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괜시리 비싸게 들여온 최신 의료 기구를 사용할 기회 그런 것 주기 전에, 의사 선생님의 시간과 배려 그리고 친절한 언어와 행동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다시 여기서 전반적인 의료 시스템의 문제로 방향을 몰아가면 어김없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여기서도 약자인 환자만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급진 친분 덕택으로 '고급적인' 병원에 쉽게 예약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곤 한다. 이것 또한 인맥과 물질의 빈부의 차이로 구별 짓고 차별을 받는 모습이다. '더러워서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나름 건강관리라는 것을 한다고 하지만 어디 아프지 않고  살아지겠는가.

질문하는 힘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한다. 정해진 시간에 효율적인 질문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연습이 필요하다. 물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인간의 행동이라 생각된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때에 무슨 질문이란 것을 하겠는가. 

묻지 말아야 할 여러 이유들을 제공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제대로 물어야 한다. 꼬치꼬치!

Sunday, September 10, 2023

나의 왼 발과 오른 발

 

해가 저무는 시간, 붉은 흙이 깔려 있는 공원 운동장의  둘레를 맨발로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대부분은 노년의 맨발들이다. 맨발로 걸음으로 해서 발바닥에 분포한 신경 반사구, 림프 체계, 신경 말단을 자극해 늘어나는 뱃살과 주름진 시간의  우울증도 좋아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맨발로 공원 운동장을 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였다. 사람마다 인터뷰를 해서 물어 보는 것도 그렇고해서 직접 신발을 벗고 참여해 보기로 하였다. 

먼저 벗은 신발을 벗어 놓아야 할 곳을 찾아야 했다. 대충 훑어보니 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돗가에 많은 신발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흙바닥을 내딛는 순간 그동안 무거운 몸무게를 가장 밑바닥에서 견딘 하얀 발이 밖으로 나온 나의 오른 발과 왼발은 부끄러운 듯 창백했다. 이왕 마음을 먹은 김에 허옇게 질린 나의 발들을 양말 속에 들이지 않고 감행을 하기로 했다. 

아무리 무거운 시간을 견딘 발이었지만 맨발로 흙바닥을 내딛으니 어리고 여린 고통이 느껴졌다. '따금 따금'한 고통의 자극이 어떤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모양이다라고 짐작을 하였다.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편안한 담소를 나누며 걷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느린 속도로 조심스럽게 운동장 두바퀴를 걸어 보았다. 어떤 사전 지식 없이 '무식 용감하게' 덤벼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발을 씻으러 수돗가로 가게 되었다.  

넓은 운동장은 축구용으로 만들어졌다는 듯 페인트칠이 벗겨진 축구 골대가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공을 차며 축구를 하는 젊은 친구들에겐 맨발로 걷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모습인가. 맨발로 운동장 둘레를 걷는 사람들이 더 많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젊은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 같다.  공원 내 시설의 용도를 따져볼 때, 다수의 사람들과 소수의 젊은 친구들의 용도가 겹칠 때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한다지. 젊은 친구들이 세게 찬 공이 얌전하게 운동장 안에 있으란 법이 없지 않는가. 구청 살림은 언제나 가난하기도 하고, 돈 쓸 곳은 많고, 냅두고 방치하면 이런저런 사고가 날 것 같은데 말이다. 

해가 지는 시간은 주름진 사람들이 일찍 저녁을 먹고 나오는 시간이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저녁밥을 먹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혜롭게 서로가 한정되어 있는 공간을 잘 사용했으면 한다. 사람들은 생각외로 지혜로우니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팔 것이라며 뒤로 물러나 본다. ㅋ 이런 소극적인 자세가 별로이지만서도......귀찮고 피곤하다. ㅋ

수돗가를 찾아가서 흙이 묻어 있는 발을 씻고, 수건을 챙기지 않아 발에 묻은 물기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으며 선채로 다시 양말을 신고 신발을 챙겨 신는 일련의 과정이 불편하였지 싶다. 마땅한 의자가 없음이다. 이 또한 준비물이 필요한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불편함을 해결하면서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지 궁금하긴 하다 

대충 발의 물기를 양말로 제거하고 신발을 신으니 걸음이 날아갈 것 같다. 신발이 없는 세상엔 어떻게 살았을지.....갑자기 발에 신겨져 있는 '운동화'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왔다. 적당하게  '푹신푹신한' 편안함과 거친 바닥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함을 갗춘 내게로 온 '운동화'는 특별한 날에 신는 뾰족 구두보다 훨씬 소중하다. 

집으로 돌아와 스마트 검색을 해보니,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자세와 동작에 특히 신경을 써서, '걸을 때는 항상 발뒤꿈치가 아닌 발바닥의 허리 부분에 몸의 무게를 싣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몰라서 발뒤꿈치로 먼저 내딛고 걸었는데  운동장 두바퀴로 짧은 걷기를 끝내서 천만다행으로 보인다. 

끝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생하는 나의 소중한 나의 발에게 감사하다는 말 꼭 해주고 싶다. 고마워 나의 발들아~~~

Saturday, September 09, 2023

오피'의 선택

'크리스토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기 좋은 토요일이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토요일 오후, 어중간하고 애매한 '오후 3시의 심심한 마음'을 장착하고 명장이 만들어 놓은 영화를 보러 갔나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여러 단어들이 떠올랐다. 사람과 적당한 장소, 제국주의, 냉전주의, 국가주의, 특별한 사람과 보통 사람, 과학의 힘, 어쩔 수 없는 선택, 자발적인 선택, 사랑, 입장의 차이, 이론과 실제, 현실과 이상, 사랑의 형태,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파시스트, 국가의 힘, 선과 악의 기준, 핵의 분열, 핵의 융합, 원자폭탄, 수소폭탄, 신냉전의 시대, 과학자의 양심, 프로메테우스의 불, 프로메테우스의 형벌, 천재의 오만, 평범한 사람의 시기 질투, 모욕감, 권력자의 권위, 발명자와 권력자, 이기적인 선택, 꽃과 사랑, 신념, 책임, 신뢰, 제도, 적대적 관계, 상의 의미, 상을 줄 수 있는 사람, 상을 받는 사람, 이용 당하는 사람, 일본의 입장, 원자폭탄의 피해, 아이슌타인, 히틀러, 원자폭탄의 아버지, 어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지구의 멸망......

생각거리가 많은 영화였지 싶다. 영화 초반부에 '오피'에게 부진하고도 비생산적 연구 활동을 염려하여 충고하는 대사, ' 당신은 당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곳으로 가라'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누구?''여긴 어디?'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힘든 '상황'이란 것이 있다.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있는 자긍심'이 있다면 환경을 바꿔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다. 때때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환경을 잘못 선택함으로서, 그 특별함이 보통에 지나지 못해 심지어 미치지 못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처럼 '양자 물리학'이란 단어를 자주 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문과 출신인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쉬운  설명을 들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양자 물리학'이지 않나 싶다.  국익을 위해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하는 과정에서 결정지었던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갈등적인 면면을 들여다 보게 만드는 영화였다. 결국엔 개인적으로는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며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갈등의 양상들을 지혜롭게 잘 조율하고 해결하고 잘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묻는 영화였지 않았나 싶다. 

위험천만한 '원자폭탄'을 만들어놓고 지구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무분별하게 만들지 말라는 조약을 만들면 핵이 없는 나라는 '어떻게' 자국의 이익을 챙기고 잘 살게 되는 것인지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지구 종말은 서로의 견제와 기본적인 '인류애'를 기반으로, 서로가 자멸하는 '핵'으로 인한 파멸을 쉽게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생각한 것은 환경오염으로 초래된  '지구 온난화'로 지구멸망이 오는 상상을 했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초미세 세균들에 의해  정복되는 불길한 상상의 두려움과 '핵'의 존재감에 오는 '두려움'이 섞인 '불완전한 세상'에 대한 불안함이 밀려온다.   바로 옆, 같은 반도 내에 동일한 언어를 쓰는 다른 나라 '북한'에서 핵실험에 총력을 가하고 생존의 유일한 방법으로 핵을 내보이는 도발적인 행동을 일삼는 지경에, 이제 북한이 러시아와 중국과 함께 연대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신냉전시대'라는 말이 불안하다. 끼리 끼리 연대를 하여 동맹을 하고 긴장감을 높이면 '힘의 균형'으로 어쩌면 전쟁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편리한 생각도 하게 된다. 맨날 '살과의 전쟁' '코로나와 전쟁' '술과의 전쟁' 이런 단어들로 '자신과의 싸움'을 힘들게 하고 있었는데, 그만 눈을 돌려 거국적인 사안도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뭐라고? 개인전이나 잘하라고? ㅋ'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더 말하자면, 오펜하이머가 투루먼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손에 피가 묻은 느낌이다'라며 과학자의 양심을 언급하자 투루먼 대통령의 반응이 인상적이었지 싶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는 그저 일을 한 것이고 , 그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을 사용해서 무수한 인간들을 살상하는 결정을 내리는 권한은  '권력자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묻은 손은 권력없는 과학자의 것이 아니고 권력을 지닌 통치자의 것인데 '어디서 감히 피묻은 손!' 권력자의 오만 방자한 느낌을 주는 장면은 오피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장면으로서 충분했다.

'상'이라는 단어는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이다. 상을 받으면 그동안의 수고가 보상을 받는 느낌이 들어 뿌듯해지기도 하고, 또한 그 동안의 고생과 노력이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더 잘하라는 격려 같아서 더 열심을 내는 동기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고 하겠다. 특히 권위가 있는 고급진(?) 상을 받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만큼의 사회적인 보상을 받는 것 아니겠는가.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가 끝날 즈음에 배치해 둔 대사, ''상'을 주고 치켜 세워주면서 이용하는 그 특별한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문장은 섬뜩했지 싶다. 공산주의 성향이 있는 아내와 애인 그리고 동생 등의 백그라운드가 있는 '오피'는 '공산주의자'라는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고, 결국  '보안 인가'를 받는 것을 실패함에 따라 결과적으로는 그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급 권한'을 내려 놓아야 했다. 역동적으로 시대가 변함에 따라,  천재적 특별함으로 빛났던 별같은 존재가 '빛'도 없이 삶의 긴 시간을  평범한 과학자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별'이라며 반기는 것들은 결국 빛을 받은 별의 반짝이는 빛이라고 한다. '오펜하이머'란 영화를 통해 감독이 안겨준 별빛을 한 동안 반짝거리며 품고 있을 것 같다. 

Friday, September 08, 2023

항상 밝은 얼굴의 그늘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한낮엔 불꽃같은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과 가을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바람의 인사에 반가운 소리를 낸다. '아, 시원해'하며 어느 광고속에 나오는 모델처럼 가을 바람을 반기는 것은 나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무더운 찜통 더위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처럼 사람들의 선한 의도는 귀하다. 마음이 한여름의 더위처럼 후덥덥하고 열이 치받쳐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려고 노력이라는 것을 하였다. 평소 인사만 하던 이름도 모르는 분이 처음으로 말을 건넨다.'항상 그렇게 밝으세요' 그때 나는 마음이 하도 시끄러워서 인사하고 싶지 않았지만 예의를 잃고 싶지 않아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휙 지나가던 참이었다. 마음은 부글부글 뜨거운 물이 끓고 있는 참이었다. 그렇지만 헝클어진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응대를 한다는 것이 그만 '아니에요, 억지로라도 웃는 것이에요' 그만 이상한(?) 말을 하고 말았다. ㅋ순간 허공에 떠 있는 이 말에 서로가 놀랐던 그 순간은 '당혹함'이었지 싶다. 삐져 나간 말을 내뱉은 당사자 자신도 놀라 '항상 인자하시고 편안한 얼굴로 계셔서 멋지십니다^^'란 문장으로 뱉은 말을 바삐 가리고 그 자리를 피해서 걸어 나오며 후회를 하였다. '그냥, 아무말 하지 말고 비긋이 웃을걸~~~' 뭘 그리 성실하게 대답을 한답시고 아무 유익없는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항상'이란 말과 '밝다'라는 말로 묘사될 수 있는 칭찬은 참으로 감사하고 귀한 것이었는데...

'항상'일리 없고 늘 밝을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계시는 분에게 일부러 불편해 보이는 '억지로'라는 말을 사용을 한 것은 과한 반응이었지 싶다. '밝은 얼굴의 그늘쯤'은 짐작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이제 웃는 얼굴이 더 이상 순수한 웃는 얼굴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지 않는가. 인위적인 웃음을 짓는 사람들을 싫어했음에도 살다보니, 그나마 찡그리고 웃음기 없는 얼굴 보다는 낫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 얼굴의 표정은 진짜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 모양새이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감정을 감추고 밝은 미소를 장착한 친절한 사람에게 뒷통수를 맞아 본 적이 내게도 있다. ㅋ 마음 속의 풍경을 다 끌어내어 투명하게 보여 주고 남았던 것은 심하게 말해서 '후회막심'이란 것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사람들의 성장 배경, 인품, 취향,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지는 것이 당연하기에 '절대 자신과 같은 공감'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인내심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진솔한 대화가 통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알고 싶은 것'만 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장이 다르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그런데,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신다. '밝고 에너지가 넘쳐 보여서 멋지십니다.'

삶의 좋은 태도는 좋은 마음에서 그리고 좋은 태도에서 좋은 마음이 서로를 떨쳐내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매너가 사람의 인격을 가름하듯 예를 잃지 말고 어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억지로라도' 웃는 것으로 못난 나를 훈련시켜 보기로 한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 정말이야!!'

Thursday, September 07, 2023

자기 하기 나름

 '적당한 스트레스'란 말이 며칠 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좋은 일 궂은 일 할 것 없이 모든 일에는 새로운 자극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고 한다. 아마도 살아 있는 동안은 스트레스가 없는 생활이란 어려워 보인다. 관계주의인 사회에서 '배려와 존중'이 결여될 때 자극되는 스트레스는 그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들과 연결 고리 없는 삶이란 불가능할 것인데, 그 적당한 스트레스로 인한 감정 노동의 댓가를 치루고도 감내할수 있는 내 '마음의 근육'이 문제인 모양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은 크나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근본적인 매너를 밑바탕에 깔면서, 불합리한 관계에서 나오는 찌꺼기들을 받아내고 당해야 하는 사람의 희생적인 적응 '노력의 불충분'으로 돌리기 쉽상이라는 것이다. 상호존중을 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첫째, 먼저 물어야 한다. 나 아닌 다른 타인과 일을 함께 할 때는 타인의 생각과 의견도 물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라는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화'라는 것을 해야 한다. 혼자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명령조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배려와 존중이 없는 태도로 보이기 쉽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원활한 의사소통 대신에 일방적인 전달을 하는 것으로 '닥치고 시키는 일이나 하라'는 것인가. 

두번째, 구체적인 피드백이 있어야 한다. 권한이 있는만큼 책임이 있는 것이고, 전문적인 자신감으로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할 것이라면, 프로답게 일의 경과에 따른 피드백과 적당한 격려와 칭찬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혼자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결단하여 진행하는 행위가 인정 받고 싶은 실력의 권위를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보기 흉한 불통의 자세이고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세번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언행은 대부분 '자기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관계에서 조금 우월한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여차없이 개념 없어 보이는 행동들을 저지른다. 타인의 생각을 전혀 묻지도 않고 배려하고 싶지 않은 그 무개념의 태도를 키운 환경이 문제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권위적이고 차별적이다. 결국 자신의 언행을 뒤돌아보는 자기검열의 시간을 갖고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개념의 바보와 싸우지 않는 것이다.' 

연일 보도되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의 관계에서도 보이듯이, 합리적인(?) 제도를 확립하지 않으면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다. 중재와 상담을 담당할 전문기관이 없고, 각자의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 극히 어려운 문제이고,  뾰쪽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논리로 문제를 덮고 유야무야 당하는 자의 고통을 방치하는 사회에서 버티는 자들은 강자이고 무너지는 자는 약자이다. 

Wednesday, September 06, 2023

여름을 걷다가

 

                                           

관리가 되지 않은 공원의 첫 인상은 '자갈밭'이었다. 잡초라고 불러지는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모습은 자연 친화적(?) 방치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어두운 시간에 돌부리를 피해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넘어져 무너질 일은 아니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울퉁불퉁'한 자갈이 박혀있는 흙 길과 정이 들었나 보다. 완벽하지 않는 길을 따라 걷다가 멋진 하늘도 보고 때를 따라 꽃구경도 제법 하는 편이다. 

특히나 눈과 비가 내려 미끄럽거나 혹은 잠기거나 할 때 아무렇게나 박혀있는 거칠고 단단한돌부리들이 아주 유용한 존재로 그 존재감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자갈과 흙이 반반 섞인 길에서 깨달음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포근포근'하고 기분이 좋은 흙길의 산책길이 비로 인해 질퍽한 길로 변하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거칠고 모가 있는 돌부리들이 유용한 디딤돌 노릇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기 전까진 너무나 자연친화적인 공원의 모습에 세금은 거둬서 어디에다 쓰는지 궁금했던 물음표는 깨달음을 주는 것으로 불만을 잠재운 것 같기도 하다. 공원이 잘 관리되어 배수가 잘되어 있는 흙 길을 걷게 되었더라면 아마 다른 선물을 받았을 것이다. 땅보다는 하늘을 더 바라보고 걷기를 하지 않았을까. 

콘크리트 삭막한 도시 풍경 속에서 드넓은 하늘의 얼굴을 자주 보게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선물이다. 특히 해가 지는 노을을 간직한 도시풍경을 자주 보게 되는 것도 자갈길이 있는 공원에서 받는 특별한 선물이다. 저녁 노을은 빛과 먼지의 판타지로 언제나 질리지 않게 빨리 끝난다. 때로는 지리멸렬한 일상의 것들을 노을처럼 채색할 필요가 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아직 여름

 찜통 더위로 인해 에어컨을 켜고 잠들어야 하는 시간은 아직 모든 것이 여름이다. 옷 가게와 홈쇼핑은 일찍이 무더운 날씨와 상관 없는 듯, 가을의 멋진 날을 상상하게 하고 상품들을 팔고 있지만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찜통 더위로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에도 미처 여름 옷을 집어 넣지 못한 채 겨울 옷을 꺼내어 입었던 터라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게 되었지만 말이다. 

아침 뉴스에 나오는 이상 기온으로 온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증상은 각성하고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이상한 날씨님을 이용하는 무리가 있더라도, 자연을 보호하고 지구를 아끼자란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일 것 같다. 막상 눈앞의 물질에 눈이 어두워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을 하자는 돈의 논리에서 벗어나가기 쉽지는 않아 갈등하겠지만 그 갈등은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져서 사막의 메마른 땅이 진흙 땅으로 변한 모습은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아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균들이 이 세상으로 나온다고 하더니, 오래된 잠에서 깨어난 '고대 새우'의 움틀거리는 모습은 신기하기 보다는 두려운 등장으로 다가왔다. 다시 날씨가 예전대로(?) 돌아가면 잠시 깨어난 고대 새우가 잠을 자러 들어간다는 뉴스이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이러는 것일까?'

'이상기후'로 인해 식량이 가장 민감한 반응을 할 것이라 한다. 기후 대에 따라 곡식이 자라고 해수면의 온도에 따라 물고기들이 서식지를 옮길텐데, 우리 모두가 서둘러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들어서고 만다. 국내 물가 상승 지수가 석달만에  또 올랐다는 뉴스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는 말은 지금도 맞는 말이다. 살기가 팍팍하면 흉흉한 사건 사고가 더 늘어날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날씨님이 예측 불가 하다고 해서 인간성 마저 종잡을 수 없이 날뛰어서는 안된다. 이럴 때일수록 타인들에 대한 배려심을 가져야 한다. 따뜻한 사람으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고, 욕심 부리고 질투하고 짜증내는 못난 모습의 자신도 용서하고,  나를 용서하듯이 타인을 용서한다면 다가오는 겨울의 삭막함을  덜 힘들게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멀리 남쪽 땅에 계시는 주름진 아부지도 겨울을 위해 무와 배추 씨를 텃밭에 심을 것이다. 도시에 살고 있는 딸도 좋은 씨를 뿌려야 하는데, 오늘도 마음밭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 뽑느라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이런 허허로움에 얼른 좋은 씨앗을 심어야 하는데^^

                                             '여름을 걷다가'



Tuesday, September 05, 2023

착한 사람들의 거짓말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시절엔 온 가족이 커다란 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었었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맛있게 먹은 기억과 함게 상당히 엄격한 가르침을 더불어 먹어야 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고 만다.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특히 온 식구가 모일 수 있는 아침 밥을 먹을 때 주로 가정교육이 이루어지기 쉽상이었던 것 같다. '후다닥' 얼른 밥을 먹고 학교에 가야 하는 아침 식사시간에 이루어지는 가정교육은 단호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답고(?) 그립고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의 시간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큰 목소리를 함께 얹어 먹은 아침은 절대 체하지는 않았다. ㅋ 타고난 튼튼한 위장과 살로 뼈로 가라고 말씀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때문이었을까.

사랑의 이름으로 나오는 지적질과 가르침에 가끔은 수저를 놓고 벌떡 일어나는 불효(?)의 모습으로 굳은 불쾌감을 보였지만 일방적인 소통의 방법도 하나의 소통이려니 감내해야 했었다. 어쩌면 인내심이 부족하고 싸가지가 노란 못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불효 막심한 모습을 드러내는 아직 어른답지 못한 순간이었지 싶다. 이 또한 아버지가 늙고 나니 그립다.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의 집에는 멋스럽게 휘갈겨진 네 글자의 한자'근검정직'이라는 가훈이 있었다. 물질이 넉넉하지 않으니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절약하고 살아야 가난에서 벗어 날 수 있었음이다. 사치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개념이 없을 때였다. 그 당시 커다란 오도마 사탕 한개를 더 사먹으면 나름 사치요 돈의 낭비이지 않았을까. 지금과 달리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던 그때,  '바르게 살기'의 한 슬로건으로 '근검정직'은 한 집안의 가훈으로 충분했지 싶다. 

정직한 태도라 함은 무엇인가.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직한 태도로 어찌 사회 생활을 매끄럽게 할 수 있겠는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때때로 지불해야 할 댓가들이 있다. 하지만 웬만하면 부지런하고 정직한 엄마 아부지의 유전자를 가진 나는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왕비와 공주의 유전자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음은 일찌기 어린 시절 알고 말았다. 그깟 레이스 양말과 반짝거리는 구두에 말이다. 

시간의 필터를 지난 기억은 좋은 것만 유리한 것만 기억하고 수집하였을 것이지만 어린 시절 나는 거짓말을 자주 하지 않았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거짓말은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얼굴이 빨개지고 두근 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기분은 별로 편하지 않다라는 것을 일찌기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그 속도를 쫒아 갈 수 없었고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했음이다. 다행히! 어느 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을 먹어 버린 것이다. 

오히려 어른이 되어서 상대방을 배려한다며 하얀 이쁜 거짓말, 마음을 다쳐서 상대에게 쏟아 부었던 감정형 거짓말, 사회생활에 적당히 필요한 생존형 하얀 거짓말을 할 때가 생기더란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대방을 배려해서 나온 하얀 거짓말은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거짓말을 살짝살짝 하는 모습은 나의 정직함과 대치되는 것이다. 

신뢰를 쌓을 수 없는, 거짓말 하는 착한 사람들의 심리가 알고 싶기도 하다. '정직은 부정직보다 돈에서 멀어지게 되어있다'(플라톤)라는 말이 있듯이, 물질 만능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주류인 세상에 살다보니 정직하면 손해 보는 일이 많은가 보다. 때로는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방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혹은 자신의 우월함에 취해 병적으로 충동적인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 또한 삶의 한 방식이니 그러려니 넘어가 본다. 나름 사정이 있겠지 싶다.


Sunday, September 03, 2023

졸리는 월요일

 아, 졸린다.

출근하지 않은 날을 이용한 알찬 자기 계발 계획을 세웠는데, 막상 이 풋풋한 가녀린 게획이 굳어진 생활 패턴 속에 삐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계획을 쉽게 현실에서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출근하지 않은 날에는 긴장을 풀고 좀 더 안락하고 편안하게 푹 쉬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이다. 치열하게 자신을 내몰고 싶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나이 먹은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지 못한 계획들은  포근한 소파 안으로 쓰러진다. 출근 하지 않은 날에 해야 할 생활형 일들을 하다 보니 좀처럼 시간을 만들 수 없다. 뭐 그리 일이 많은가? 티나지도 않은 집안일들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고 나서의 그 뒷당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하찮아 보이고도 사소한 일의 중요함을.

요즈음은 쇼핑을 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 든 편이다. 차를 끌고 나가 쇼핑을 해서 집으로 오고 가는 시간도 줄어졌고, 충동구매라는 것도 덜 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을 겸하다 보니 집대문까지 배달을 해주는 온라인 쇼핑의 편리함이 감사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왜 자기계발을 할 시간이 없지? 아무래도 재미난 연속극 탓인가 보다. ㅋ

핑계인가? 하필, 집안 일을 하면서 습관처럼 켜놓은 텔레비젼 연속극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에 걸려 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드라마 전편을 다 보지 않았지만 잠깐 동안 보다 보니 무슨 내용인지 알겠다. 몇 장면을 보고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떠올랐다. '뭐여, 복사 붙이기 한것이여?' 

작가님이 영감을 받어 일종의 로칼라이제이션(?)이라 할 수 명명할 수 있는 조선시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만들었다는 정보를 보면서 자신의 예민한(?) 촉에 대해 조금은 안심이 되긴 하였다. 우리 실정에 맞는 이야기로 각색했다는 점에서 원작을 보았던 그 옛날을 떠올리며 보니 더욱 재미가 났던 것 같기도 하다. 잠을 설치기까지 하며 마지막 회를 본방사수 하니, 민감한 생체리듬이 엉망으로 꼬여 버린 것이다. 제2부를 하기 위해 안타까운 설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해하지만, 슬픈 결말과 미리 제공한 예사롭지 않은 제 2부의 떡밥 영상은 한참 동안이나 제법 마음을 시끌시끌하게 하였다. 10월에나 새로이 한다지...ㅠㅠ 걸려들고 말았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이 피곤하다. ㅋ

흔하디 흔한(?) 사랑 이야기인데 아직도 이런 낭만 이야기에 마음이 아프다니...작가가 대본을 잘 쓰고 배우님들이 연기를 몰입도 있게 잘 한 모양이다. 혹시 대리 만족을 하고 있나? 엇그제 밤엔 '무빙'을 보다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직도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니...깜짝 놀랐지 싶다. 안구건조증 때문에 인공 눈물을 넣고 있는 지금의 시간에 천연 눈물이 철철 넘쳐났다는 사실은 분명 큰 감동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다수의 작품성 있는 작품을 보면서도 저절로 눈물이 흘러 나온 경험은 쉽게 가질 수 없었던 터라, 모처럼만의 천연산 눈물이 반가왔다.

그래서 난 나답게 하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ㅋㅋ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질 못하는 모양이다. 그냥 좋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좋은 마음으로 나름 최선을 다해도 사람들은 알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서글퍼하거나 노여워 하면 정말 모지리다.ㅋ 나는 나대로 나답게 최선을 다해 내 길을 쭈욱 가면 되는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카렛이 한 말 있잖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여!'(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내일은 덜 졸릴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