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31, 2019

Time Has Home

Time has Home

모든 것을 떨구고 서있는 겨울나무 아래 걷고 있자니 잔가지 하나가 머리위로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까치 한마리가 보금자리가 될 나뭇가지 하나를 그만 떨어뜨린 모양이다.  겨울같은 잔가지 하나하나를 물어 날라 집을 짓고 봄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Monday, January 28, 2019

No Resistance

이리저리 텔비 채널을 돌리다가 저항하며(?) 살아있으라고 말하는 어느 교수님의 강의에 멈칫거렸다.  '저항'을 일으키지 않는 효과적인 수영방법을 수련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그동안 노력했던 것들에 대한 의문을 품게한다. 나답게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항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아직 남아 있긴 한것인가.

살아있는 짐승의 번쩍이는 눈을 갖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부터 길들여지지 말아야 하고 본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은 충격적이었지 싶다.  인상이 고분고분해 보이지 않고 거칠어 보이는 언행을 저지르는 사람으로서는 듣지 말아야 할 역설적인(?) 충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첫째로, 충고하지 않기 둘째는, 충고듣지 않기! ㅋㅋ
두가지 지켜야 할 것은 '무한 자기 신뢰'요 다음은 '무한 자기 사랑'이라~~~

나라는 사람의 존엄성을 깨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것이고, 결국은 타인의 존엄성 또한 침범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은행업무를 보다 심심해서 수영관련 동영상을 보았는데, 일부러 저항심을 경험하는 훈련이 있었다. ㅋㅋㅋ 저항을 일으키지 않는 수영이 얼마나 효율적인 것인가를 깨닫기 위해 저항훈련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ㅋㅋㅋ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님이나 실컷 저항 많이 일으키며 수영 하시와요~~~
ㅋㅋㅋ 영리한 여우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수영을 하며 단합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회식으로 단합을 이루며 단체수모까지 함께 쓰면 어떤 효과가 생기는 것일까?  저항하고 싶지만 ㅋㅋㅋ 참아본다.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닌데 저항까지 하고 그러면 안될 일일 것 같다는 겸허한 생각에 도달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편하긴 하다~~~ 그래서 어울리지도 않는 수모를 쓰는 형벌을 감내해야하는  댓가를 치루어야할 모양이다. 

최근 읽고있는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란 책에서 '양탄자 밑에 숨겨둔 뱀'이란 단어와 마주하였다.   집단의 평화를 위해 불만스러운 생각을 양탄자 밑에 숨겨두고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볼 수 있었지 싶다.  유연하게 굴지 못하고 모가 두드러진 언행을 저지른다는  평가가 두려워  밖으로 제대로 말하지 못한 숨긴 생각들이 양탄자 밑에서 혹시 괴물로 자라나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았다.

그려, 저항할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Wednesday, January 23, 2019

For Life-Chaos

조던B.피터슨(Jordan B. Peterson) 이 지은 '12가지 인생의 법칙-혼돈의 해독제' (12 Rules For Life-An Antidote to Chaos)와 만나고 있는 중이다. 하루에 한 챕터씩만 정독하자며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다. 책이 약간 두껍고 글자가 많아 ㅋㅋ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름 계획을 세워 차분히 읽다보니 어떤 중압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법칙 3, 당시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법칙 12,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어두움만 들여다보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행복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좌충우돌 흔들리며 중심을 잡아가며 나름 의미를 만들며 살아가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완성적인 그 부분이 있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가 있는 곳에 삶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는 생각을 품어 본다.

사람을 개와 고양이로 대담하게 분류한다면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하는 자문을 해봤다. 친절한 개와 도도한 고양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애교와 친절 그리고 충성 그런 개의 사교성도 필요하지만  고양이의 홀로 자유가 절대로 필요로하는 삶 아니던가.

본래 모습을 품어주고 감싸주는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기로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게 상처받고 망가지는 모습은 우리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인지도 모르겠다는 기특한(?)ㅋㅋ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이.

into my Own, Mix Media, 40x40


Tuesday, January 22, 2019

The Door

인사동 겔러리를 방문하다. 작가의 정체감 대신에 스포츠인으로  살아 가는 부인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인사동에 나가자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지 않은가.

오랜만에 전시회란 단어와 만났나 보다.  얼마만인가! 시간은 사랑했던 혹은 집착했던 많은 것을 희미하게 만든다. 전시회에 필요한 단어들을 머리 속에서 찾아 내느라 힘이 들었다.  적당한 전시회장과 시간을 정하고, 그림을 운반하는 택배회사와 그 운임과 써비스의 질을 알아봐야 하고, 초대하는 카드와 화보집을 만들어야 하고, 전시회 타이틀과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도 필요하고, 그림제목과 사이즈 그리고 미디엄의 정보를 담는 라벨과 겔러리 도면 배치도에 따라 그림을 배치할 계획도 필요하고, 리셉션 등등의  지금은 낯설어 멀게만 보이는 단어들이 신경을 쓰게 만든다 괜시리.

잠을 설쳤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해 얼기설기 얽혀서 올라왔다 사라지는 시간은 평화롭지 못하다. 전전반측 어두운 시간을 지나도 마음의 다짐을 굳히지 않으면 상당히 흔들릴 것 같다.  관성의 법칙이라고 해야할까. 지금 내모습이 싫지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단다. '전시회를 하면 작가요, 하지 않으면 작자라고!' ㅋㅋ ㅠㅠ

전시회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평화롭고 하루가 짧은데 이제와서 굳이 '작가'란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그리 갈망하지 않는 전시회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만들어 흔들어 깨울 필요가 있다는 말엔 반항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말았다.

아침운동을 하고, 좋은 글을 읽고, 집안 일을 하며 저멀리 있는 그리운 그림 생각도 하고, 뭐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난 핑계를 내밀고 있는 것인가.  설거지를 할 때마다 시간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어떤 명상에 가까운 즐거움마저 찾고 있는 지금의 내가 그리 한심하지는 않다. 산더미로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며 무엇인가를 깨끗하게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너무 사소한(?) 것에 의미를 심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자문해 본다.  '전시회'란 말은 가슴이 뛰는 단어이지만  마음 깊은 어느 서랍에 넣어두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여기 있는 난 그동안 흘려보낸 시간이 길들인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제대로 잘살고 있는가하는 물음표를 아직은 품고 있기에 흔들리는 것이다.




Monday, January 21, 2019

말은 움직인다~

말은 생각을 지배한다고 한다라는 말을 '말모이'란 영화속에서 다시 만났다. 언어란 살아있는 것이어서 사용하다 보면 주술에 걸리고 다시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은 다들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자국의 언어를 강요하며 한글을 금하고 있을 때,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민족의 뿌리인 한국어사전을 편찬하였던 사실은 위대한 일로 생각된다.

거대한 권력에 대항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닐 것이다. 개인에게는 불이익이 돌아오는 현실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더 큰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의미가 있지 않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도전이요 모험이며 혹은 무모함일 것이다.

기득권도 아니고 지식층도 아닌  변두리 인물,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어 눈치 빠르게 살아가고 몸으로 삶을 부딪혀 나가는 캐릭터가 아들과 딸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떠날 만큼의 의미는 영웅적이다. 부모없이 세상에 남아서 힘들게 살아갔을 중학생 아들과 어린 딸은 어찌 한단 말인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전개였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한글'의 소중함을 깨닫고 일어날 때, 옆좌석 이름모를 젊은 여인은 엄마는 울었냐고 묻는다. ㅠㅠ 자신은 울지 않았다며 어쩐지 영화에 몰입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양. 영화관이 캄캄해서 다행이었지 싶다. 다들 눈물자국이 났을텐데 말이다.

영화를 보고난 후, 며칠은 의식적으로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언어생활을 꾸려 나가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Sunday, January 20, 2019

The West Island

미국 드라마, '웨스트 월드' 처음 시리지를 재밌게 보았던 터라 후속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티비를 통해 재밌게 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진 이유로 할 수 없이 후속편을 보게 되었다.

음~~~

에치비오(HBO) 채널에서 방영한 드라마답게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거대자금 투자적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인조인간들이 디지털적으로 업데이트하며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인간으로 부터 익힌 악행을 저지르며 승리하여 결국엔 인간세계로 들어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란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기억'이란 단어에 무게가 많이 실렸던 것 같다.  사랑했던 기억으로 오늘을 살고 미래를 개척해 가는 모습은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었지만 캐릭터들이 평면적이고 매력적이지 못해서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잔다르크의 혁명성과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고뇌하는 철학적 인간형상과 잔인한 프로그램으로만 이루어진 숙명적 인간의 모습을 볼 때, 사람의 운명이란 각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피하고 싶은 약간의 중압감을 느꼈기도 하였다.

선악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창조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유의지'란 어려운 단어가  너무 시체더미 속을 통과하는 모습이라 그런 것인지 불편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혁명이란 그렇게 불편하고 잔인한 희생을 댓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였다.

선택된 사람들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설정 또한 약간은 섬찟하였기도 했다.

 웨스트 월드를 여행하고 나서 머리속은 설정, 자유, 사랑, 기억, 업그레이드 이런 단어들로 혼란스럽다.정말 심심할 때  이 드라마의 과도한 잔인함과  무거운 철학적 고뇌감을 다시 한번 음미해봐야 할 모양이다.

Thursday, January 17, 2019

Sport is the Manner

스포츠의 마지막은 매너이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멋진 문장이라 올려본다. 운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살다보면 매너를 못지켜 빚어지는 일들이 있다. 생활체육을 하는 사람으로서 운동을 참여하는 사람들은 각기 행복하기 위해서 시간과 물질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만나고 또 그것을 극복하며 수용하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즐겁고 신나는 운동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본적인 소양들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인가.

좋은 뜻으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언의 형태가 진정성있는 모양이 아니면 간섭질과 갑질로 왜곡될 수 있다는 말은 생각하면 할수록 몸이 쪼그라드는 무서운(?) 말이다 싶다.

'물어보지 않으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지 말아라'

돌이켜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도 알게 하려고 했던 착한(?) 순간들이 떠올랐지 싶다.

지적질과 간섭질 게다가 잘난척스럽게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그려, 간섭본능이라고 생각하고 입다물고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야 마음먹었지만 다시 도와주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 그만 또 가르치고 말았다.ㅋㅋㅋ

어디 자원봉사라도 가야지 싶다. 가르치고 싶은 타고난 본능을 살려 봉사라도 해야한다는 소명을 깨닫는 순간이다.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 개성, 경험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매너가 필요한 것이다. 선을 지키고 나를 지키고 그리고 자유할 수 있는 내공을 길러 스스로를 비추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운동을 통해 배우고 있는 중이다.






Wednesday, January 16, 2019

My Name is Red

이봐, 내가 인생에서 두려운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버릴 거라는 거야  -마크 로스코

서서히 밀려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언제부터  분명하게 알게 되었는지 그 시간을 말할 수 없지만 아침운동하는 수영장에서 그 비슷한 느낌과 맞서 간혹 부딪히고 있다고는 할 수 있다. 지적이고(?) 자의식이 강한 편인 사람으로서  자꾸만 내려오라고 말하는 세상과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자신의 자리가 어느 곳이란 말인가. 침묵의 어두움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빨강으로 움직일 것인가 말이다. 아직도 좌충우돌할 힘이 있는가 자문해 본다.

Black, Red, and Black, Mark Rothko




Monday, January 14, 2019

Draw in/out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에바 알머슨의 초상들은 동양적인 친근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머리가 극도로 크다든지, 달같이 동그랗게 그린다든지, 코가 작아 콧구멍만 그린다든지 ㅋㅋㅋ 알록 달록 색 배합에 별 어려움 없어 보이는 색선택을 예로 들고 싶다. 작품이 동화적이고 만화적이며 아동적이라 그런 것인지 어린 친구들이 전시회에 많았던 것이 인상적이었지 싶다.

스페인 태생인 그녀의 작품에서 스페인적인 것을 찾는 것은 좀 어려웠지 싶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그녀의 초상은 왜 그리도 동양적이어야 했던 것인지 궁금하긴 했다. 한국의 남산과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초상들은 평면적인 그림이었다. 제주도 해녀들을 보고 그렸던 그림들은 단순하였다. 이 시점에서 왜 다들 그녀의 이리 만만하고 쉬운 그림에 열광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일년에 몇작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슥슥슥슥 백그란운드, 미들 그라운드 포그라운드~~~ 풍경속에 초상들은 커다랗고 시각언어는 극도로 쉬웠다. 혹시 그래서 다들 좋아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는 그녀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그런 것인가?
소통하기 쉽고,  둥글둥글하고, 가족적이고 그리고 단순한 것!

에바 알머슨이 제주도 해녀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을 보고 사실 나 또한 영감 한줄기를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왜 내가 못해?! 갑자기 잠들어 있는 자신을 흔들며 깨어나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것들은 흔들려야 한다~~~

잠시나마 그녀의 작품앞에 서서 마음이 흔들렸다. 난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수영장 시리즈를 만들라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다시 일어났다 사라진다......)

습관처럼 아침을 챙겨먹고 수영장에 갔다. 관심을 먹고 칭찬을 먹은 사람들은 그 맛을 안다. 익숙하지 않은 드릴연습을 하였다. 제일 먼저 출발해야 하는 난 부담스러움이 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수업에 임했다. 그리고 쌤은 평소 친한 회원(?)을 이때라 기회를 잡은듯 못참고 칭찬을 하였다. ㅋㅋㅋ 다른 사람 칭찬할 시간에 날 좀 잡아주지 그랬어요하고 말하지 못했다. ㅠㅠ 이부분에서 나라는 사람은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보통사람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인지하면서도 조금은 불쾌했지싶다. 이렇구나 나라는 사람이 ㅠㅠ 자기 환멸에 사로잡혀서는 안되는 것이나니~~~

찝찝한 수업이 끝나고,  나답게 나름 부정적인 기운을 떨쳐내려는 접영을 하고 왔더니, 뒤따라 오던 까칠하고 바른 말 밉게 잘하는 나이든 언니가 다가와서 큰소리로 딴회원 이름을 부르며 최고로 잘했다며 의문의 일패를 더 얹으며 염장질을 한다. 순간 나는 흔들렸다.  ㅋㅋ 오늘은 무슨 날이지? 잘했다고 생각하는 회원 귓가에 대고 개인적으로 칭찬하며 깊은 유대감을 만들면 될 것을,  굳이 소리질러 같이 수영한  다른 회원들 특히 나름 자존심 하나로 열심히 날개짓하고 있는 사람을 느닷루저로 만드는 것인가. (남한테 칭찬 들을려고 수영한겨? 맨날 너만 잘할려고?) 이렇게 가로닫고 가로열며 마음을 다스려도 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ㅋㅋㅋ

이런 에피소드는 제목을 뭣이라 하지? 그림으로 나도 승화하고 말테당!!! (제목은 재수없던 날!)

행복감보다는 열등감을 맛보게 하는 언행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몰라서 어리석게 행동하는 사람탓을 하는 것과 나이 들어도 심술부리는 타인의 혀 때문에 나의 성실하고 깨끗한 에너지를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며 위로해 본다.  그들은 그들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고, 난 이로인해 더 열심히 날개짓을 하여 날아 오르면 되는 것이다. 인간인지라 칭찬먹고 관심받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에바 알머슨의 작품중에 마음속의 흐트러진 실타래속에서 실오라기를 잡고 있는 그림이 생각난다.

행복은 좋은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기분좋은 느낌 아닐까 한다.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감사함이 번져오는 느낌을 누리며 명랑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좀 더 역지사지하며 좀 더 조심하며 좀 더 입을 닫고 헐 무슨 재미로 살지? ㅠㅠ 공공장소에선 기본적인 룰를 지키고, 인간관계에선 선을 지키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좋은 말을 주고 받는 것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흔들리며~~~ 행복이란 소중한 단어의 의미를 깨닫는다.

Looking at You by Eva Almerson

Saturday, January 12, 2019

and~~~


그렇고보니, 흰두루미가 잘 보이지 않고 살오른 오리들만 여전히 잘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 하였다. 흰두루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하는 쓸모없는(?) 궁금증이 인다.  건조한 이번 겨울은 눈을 사각사각 밟는 소리를 즐기는 기회를 좀처럼 허하지 않는 듯 하다.

수컷 오리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 것일까 또 하나의 궁금증이 잠시 일어났다 사라진다. 암컷들만 모여있는 물가에서 수컷 오리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리들이 잠시 멈춰 휴식(?)을 취하는 시간은 물이 흐르는 고요함과 여유로움이 있어 보인다.  몸을 챙기고 마음을 챙기고 베테리를 충천하는 시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 맨날 충전만 하고 실속이 없다고? ㅋㅋ






Wednesday, January 09, 2019

Like Me

어느 이웃일까? 어렵고 고급스런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아침부터 음악에 젖어있는 이웃은 아랫층일까 윗층일까.

공동주택에 함께 산다는 것은 인내와 배려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나 또한 나 좋자고 이런 저런 소음(?)을  의도치 않게 만들고 살아 가고 있을 것이다.  이웃들이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웃에게 피해를 전적으로 주지 않고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식하게(?) 인터폰을 들어  속좁고 까칠하게  불평할 수 없다.

윗집에 사는 이웃은 날마다 청소기를 밤이면 돌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깔끔한 이웃은 청소를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결백증이 있을 지 모르니 참아 보기로 한다. 그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점차 9시에서 9시 반 그리고 귀를 의심할 시간 10시를 넘어 이제는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웽웽거리며 청소기를 돌린다.  아랫층의 이웃이 인내하며 아무런 저항을  보이지 않으니 청소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평온하게 잠들려는 마음은 짦게 끝나지 않는 청소기 소리에 하루의 마지막 시험을 받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겠지 하며 억지로 짜낸 인내력과 잠들고 싶은 피곤함으로 분노(?)의 고비를 넘긴다.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에 윗집 이웃을 만났다. 하지만 웃으며 인사하는 이웃에게 감히(?) 용감하게(?) 불평할 수 없었다. 비시시 웃으며 그냥 침묵하며 지나치고 말았다.  좋은 이웃으로 남고 싶은 선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 나는 청소기 소리를 참아야 한다. 아니, 더 좋은 생각으로  배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쾌한 감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한다.

다시 이 아침, 이웃의 장엄한(?) 클래식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아랫집일까 윗집일까?? 확신할 수 없는 소리에 우선 참고 본다. 그리고 싸우는 소리보다는 낫지 않냐며 자신을 다둑거려 본다. 한참이나 지난 지금 사방이 조용해졌다. 불만이 더 쌓이기 전에 말을 하는 것이 나을까? 당당하게 초인종을 누르고 불만사항을 이야기하고 사후  뒷담당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다행히, 나의 이웃들이 견디고 있을 우리집 소음들을 생각해 보았다. 구체적으로 찾아보니 몇가지가 걸린다. ㅋㅋㅋ 큰 목소리, 노래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티비소리 등등.  말하지 않으면 모를 때가 있다. 그들도 나처럼 원하지 않는 소음에 난감할 때가 있을 것이고 좋은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으로 견디고 있을 것이다~~~







Monday, January 07, 2019

Let it Go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은 붙잡지 않고 빠져들지 않는 것이라~

마음밭이 못되먹어서 그런 것인지, 어떤 여인의 말이 까칠까칠거리며 생채기를 낼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다행인가?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가 자꾸 체크하고 안되는데 민감한 마음이 들고 만다.  어떤 조언을 주고 받는 것은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아직 표시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자신이 당해 보지 않고는 상대방이 느낄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짐작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설마 고의적으로(?) 던진 말에 걸려 소중한  하루를  찜찜하게  넘어가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나의 것이 아닌데 결국엔 타인의 것으로 인해 행복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지 싶다.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줄 땐 요령이 필요하다. 주제파악이 안되는 사람의 말에 걸려 파닥거리는 자신이 잘살고 있는 것인지. 붙잡지 않고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

비교 당해서 기분 좋은 사람은 많지 않다고 뾰족하게 바른 소리를 참아 할 수 없어 비시시 웃었던 자신을 위로해 본다.  타인의 삶의 방식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으니 지금 여기 나는 내 삶의 방식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얼릉 도망왔다. ㅋㅋㅋ






Take Off

새롭게 시작하는 경건한(?) 시간에도 언제나 그렇듯이 빛과 그림자가 있다.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넘어지고 일어서는 파도가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본다.  아침 수영을 더 잘해보겠다고 들었던 일회용 면도칼이 다리에 상처를 내고, 순간 자신에게 느껴지는 실망감이란 얼마나 겸손하던지.

기억력과 판단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붉은 피가 가느다랗게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리석은(?) 자신에게 놀라기도 하였다.  상황판단이 되지 않는 그 순간에,  평소 웃으며 인사하는 이름 모르는 언니(?)가 뛰어가 응급조치용 밴드를 구해 오신다. 

다리에 물기를 제거하고 직접 밴드를 붙여준 그녀의 따뜻한 행동이 일월 이일의 잊혀지지 않는 고마움으로 남는다.  비록 내 실수로 상처를 입었지만, 타인의 따스한 손길은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은 풍경이 아니었나 싶다.아침수영을 가기전 방수테잎으로 상처위를 감싸다 보니, 이름도 모르는 아름다운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떠오른다.

어제는 '콰이엇 플레이스'란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콰이엇'이란 단어로 검색을 하면 찾을 수 없다.ㅋㅋㅋ 한국식 표기로 '콰이어플에이스'라고 입력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한참동안이나 여러가지로 시도해 본 후 깨달았다.  살다보면  영화로 하루를 보내는 그런날들이 있다. '인터스텔라'란 영화를 다시 보다가 인간이 인공지능 로봇에 설정을 하는 부분에서 잠시 자기 점검을 하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너무 솔직한 대답을 하자 당황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결국엔 덜 솔직하게 숫치를 낮추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솔직한 편에 속한 자신이 저지렀을 불편함이 떠올랐다. ㅋㅋ 예의상 10프로를 숨기고 90프로 솔직하다면 괜찮은 설정 아닌가 하며 자신의 솔직함 칫수를 생각해 봤다 잠시나마.

유머는 어찌할 것인가? 유머스러운 사람이 좋다. 하지만 현실은 유머가 왜곡될 때가 있다. 사람과 장소 그리고 시간을 가려해야 되겠지만, 유머코드가 맞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긴데 다큐로 덤빈다든지, 듣고 있자니 유머에 가시가 있다던지, 빈정대고 있다고 여긴다든지, 이 유머란 것도 쉬운 것이 아니다. 유머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이이면 내 인생에 들어와 있는 사람일 것인데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지 못할 사이이면 그리 친한 척 쓰잘데기 없는 말을 섞을 필요가 있겠는가.

유머도 예의를 갖춰야한다고?

ㅋㅋ

그러니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니~~~

Friday, January 04, 2019

The Three

3이란 숫자는 알게 모르게 우리네 생활속에서 친근하다. 원시인들이 숫자라는 개념을 성립하기까지, 3이란 숫자를 벗어나는 과정이 갑자기 알고싶어지는 이 정체모를 호기심의 색은 무슨 빛깔일까. 하긴, 색도 근본적인 원색이 있지 않는가 말이다. 빨강, 파랑, 노랑~~~

아침운동 수영을 하면서도 3이란 숫자를 본능적으로 익히고 있는 듯 하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며 몸동작을 익히며 자신의 리듬을 만들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오늘의 날짜는 새날이 3일이나 지나간 4일의 날이다. '작심삼일'이란 인간의 의지와 실천에 관련된 사자성어는 그리 편안하게 접수가 되는 것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이 날아가는 작금에 새로운 해라고해서 굳이 작심하고 덤비는 일도 하지 않는 듯 하기도 해서 그리 낙담하고 자책하는 일은 없어 보이기도 하다.

작년 이맘때쯤 소리내어 외쳤던 다짐은 이루어졌는가 묻는다면,  우아하고 강하게 날마다 노력한 결과로 구체적인 숫치를 볼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하였다. 매일 매일 쓰러지는 의지를 일으키고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한  경험은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로 오래 기억하고 싶다.

3일이 지난 4라는 숫자가 달린 깨끗한 시간들속에서 묻고 싶다. '넌 무엇을 원하니?'

어느 정치가가 언급한 '삼인성호'란 사자성어를 보면서 내가 들어 있는 풍경을 들여다 본다. 사람 셋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니 인간관계에서 보여지는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승화시켜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발전하는 것에 기여하면 좋으련만, 고작 사람 하나 이상한 사람 만드는 일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치사하고 이기적인  편집능력을 키우고 싶지 않아  삼가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처음 시작하는 마음이 필요할 때이다. 삼가 말을 조심하고 귀담아 들을 말을 조심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고 볼 일이다.





Tuesday, January 01, 2019

No Seeing

2019년 황금돼지의 해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단어 '황금'이란 단어를 수식한 돼지의 시간은 풍요롭게 시작하는 듯 하다. 숫자로만 시간을 가리는 것 보다, 열두동물의 순환하는 시간과 일본에서 시작되었다는(?) 다섯 가지의 색을 조합하여 만든 의미들은 풍부한 것 같다. 누런색을 황금으로 해석하고 황금돼지해라고 부르고 시작하니 잘먹고 잘살 것 같기도 하다.

새해 첫날 '버드 박스(Bird Box)란 영화를 넷플렉스를 통해 보게 되었다. 늦은 시간 잠이 들고 나서 새해 이튿날인 오늘 영화의 장면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콰이엇 플레이스'란 영화는 살아남기 위해 소리를 내면 안되는 상황이었다면 '버드 박스'란 영화는 두 눈으로 절대 보면 안되는 영화이다.

보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은 미치광이들만 두 눈을 뜨고 괴물과 공존할 수 있는 섬뜩한 세계가 펼쳐진다. 선한 마음을 품고 관대하게 대하면 무엇인가 악한 씨를 품은 미친 사람들은 뒷통수를 치며 불행으로 내모는 모습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상적인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매 순간 마주하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실수할 수 있다는 용서와 할 수 있다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영화에서, 눈을 가리고  새소리를 듣고 안전한 곳을 찾아가는 모습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에 민감하지 않게 하시길 소원해 본다. 추한 모습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상자안에 사로잡힌 삶을 꾸려 나가질 않길 소원해 본다.


그땐 그것이 옳았다

뒤돌아보면 뚜렷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는 만큼 정리 되어 보여지는 것들인 것이다. '홍삼수' 감독의 영화제목이었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그땐 맞았는데 지금은 틀린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왜 어지러운 말장난을 하는가 이 2018년의 마지막 날에 말이다!

살아가다보면, 애매하거나 불투명하거나 흐릿한 현실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다. 특히 당면한 문제들은 답이 없거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들 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속에 각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문제 하나하나를 넘어가다 보면 어떤 패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 여기서 아침수영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난 나름의 최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수영으로 인해 건강한 몸과 마음을 수련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나이를 품은 몸은 병들고 그 자연스런 변화에 수긍하며 긍정적인 선택을 하며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2018년의 마지막 날이라서 의미가 조금은 거창하게(?) 종결스러워질려는 것이다.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기억의 힘과 지워낼 수 있는 망각의 힘으로 2018년의 마지막 날을 잘 마무리 하고 싶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지금의 시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처음으로 가는 마지막 날에 결정적으로 무겁게 물어본다. 그땐 그것이 옳았고 지금도 옳다는 생각을 하면 딱딱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일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