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7, 2020

Noonchi (Self Monitoring)

한국에서 행복한 삶과 성공을 위하여 반드시 장착되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눈치'라는 것이다. 거기에 '애교'까지 덤으로 제공한다면 사회성이 아주 좋은 사람으로 어디서나 사랑받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음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눈치를 챙기고 가식적인 미소에 오랫동안 노출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뢰할 수 없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눈치란?
'남의 마음이나 뜻을 그때그때의 상황으로 미루어 얼른 알아차리는 힘'
'미루어 짐작할 만하게 사람의 행동에 은근히 드러나는 어떤 태도나 뜻'

 상황에 맞춰 자신의 감정이나 표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그것은 눈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시의적절'한 말을 하며 스스로가 그 상황에 적응하고자 하는 능력이라고 해석된다. 아침 운동 단체수업을 하다가 보았던 끼리끼리의 주고받는 '추임새'와 '부추김'은 나름 상황에 적응하며 강한 자를 방어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크게 부풀리려는 생존전략으로 해석을 하다보면 웃음이 나오고 만다. 어쩔 수 없는 방어기제라~~~

단체수업중에 들으란듯이 자신도 회원이면서 강사도 하기 어려운 평가를 맘대로 내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누가 제일 잘한다고 말하며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을 치켜 세우는 사람들은  대개 수영을 잘 못하고 몸풀려고 다니는 불성실한 회원사람들이다) 무례하고 배려심 없이 무식 용감하게 입을 열어 큰소리를 내는 사람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음에 틀림없다.  엄지척하며 칭찬하고 싶은 상대에게 속삭여도 충분히 진정성이 있을텐데 굳이 그렇게 언어폭력을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다.

'정말, 그 사람이 제일 잘했나 보다~~~'

자신은 잘하지는 못해도, 제대로 열심을 내어 배우고 익힌 적은 없지만 수업에 나와 누가 잘하는지 알 수 있고 보는 눈이 있다는 더럽고 무서운 캐릭터! 그런 사람은 열심을 내어 운동을 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깍아내리고 싶어한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치사한 캐릭터는 밥을 사며 인심을 얻는 일엔 열심이다. 함께 밥을 먹어줘서 고맙다면서 그러다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자신이 호구냐며 그동안 투자한 밥값 생각을 하며 부글거리느라 얼굴이 심술퉁이다.

 의도적으로  밥조직의 일원을 챙기는 말과 행동은 '자기방어적' 행동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대개 그런 짓을 과감하게 하는 사람들은 챙겨야 할 실력은 챙기지 않고 카드를 챙겨 원하는 거을 이룰 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질투와 시기 그리고 열등감까지 장착하고, 작정하고 특정 누군가를 혐오하는 양상을 보이는 치졸한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단체수업시간에 지켜야 할 올바른 회원의 자세라는 것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교과서도 없고 매뉴얼도 딱히 없고 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하며 자신들의 편리한 의도대로 변해가며  별별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양이다.  '내로남불'의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고,   터진 입으로 아무말이나 마구 지껄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조금은 궁금하다.  밥사주고 공들인 주위  믿는 사람들이 있다보니  꼰대짓과 유치찬란한 속내를 순진하게(?) 드러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평소에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애교떨고 웃음지으며 편이 생기는 일에 시간과 돈을 들이는 모양이다.

'저렇게 늙지 말아야 할텐디~~~'

바이러스다! 스스로가 격리차단  상태로 들어갔음을 후회하지 않는다~~~바이러스 눈치를 보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Monday, February 24, 2020

As you Wish~~~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사용하는 영어표현이 'As you wish~'라고 한다. 갑자기 웬 영어표현을 들고 나왔냐고? ㅋㅋ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란 책을 들쳐 보다가 영화에서 들었던 표현이 생각이 났더란다. 내 생각과 판단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수용하고 지지하는(?) 혹은 체념한 상태에서 이런 표현을 하지 않나 싶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란 제목이 도발적(?)이어서 잠깐 들여다 보았다. 젊은 작가님이 애를 키우면서 자신의 일을 나름 잘꾸려 나가는 화이팅하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젊은 작가님의 글은 맑고 건강하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은 사람이 얼마나 될른지 의구심을 갖고서 책을 들여다본 것은 사실이다.

책속에서 만난 인상 깊었던 문장은 작가가 버티기 힘뜰 때 주로 사용한다는 '이런 꽃같은 인생!이란 표현이다. 하하하! 씨를 품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 솟아올라 줄기를 세우며 자신만의 꽃을 피우다 가는 시간이 한정된 인생!

사회성이 서툴렀던(?) 자신의 30대를 뒤돌아 보았다. 30대의 젊은 엄마는 자신의 주제와 분수에 맞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월급쟁이 생활은 짐작이 가는 근검하고 절약하는 생활 아니겠는가. 남들이 부러워하며 인정해 주던 것이 있었으니, 타고난 성량으로 풍성한  단아한 목소리가 있었다. 함께 어울려 하모니를 이루며 한 목소리로 노래했던 시간들이 이제는 희미한 그림이 되었지만 그땐 나를 이루었던 커다란 부분이었다.

어린 싹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자기계발을 하려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스스로를 가꾸었던 30대의 내가 오늘로 서있는 자신을 건강하게 버팅기게 할 수 있는  일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하자. 주름지고 낡아가는 느낌이 자주 들게 하는 그런 부정적인 것들로 침범되어서는 안될 소중한 것들을 지켜야 함이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았다기 보다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착하게 꽃같이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현실속의 모습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살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이런 책제목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Tuesday, February 18, 2020

The Line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절한 관계'
'누군가를 잘안다고 생각하는 착각과 오만'

사람과 사람 사이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그 뜨겁고 쓰라린 상처후에 얻는 깨우침이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어쩌면 서로를 위해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보다. 괜시리 친한 척 필터를 걸치지 않은 말을 내뱉고 얻어지는 것은 돈독함이 아니라  흉거리가 되어 입과 입으로 전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잘안다고 생각하여 판단하고 함부러 내마음의 크기와 모양과 같으리라고 해석하고 이기적으로 편집한 적은 없는지 돌아본다. 타인이 함부러 확신을 갖고 자기해석으로 만들어낸 부정적인 프레임에 가두어 내미는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는 일을 겪으면 알게 된다. 그런 짓이 얼마나 사람에 대한 예의가 결여된 오만과 방자한 일인것인가를.

어릴적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다다를 수 없는 천정 가까이에 우러럴 볼 이상적인(?) 위치에 걸려 있었다. 한자로 휘갈겨져 있어서 궁금증을 유발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저것이 무엇인가요? '근검정직'! 근검정직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이상적인 가훈을 되새기는 어린나이에 느낌은 단순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학교가서 착하게 생활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가 분명했던 시대였음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ㅋㅋ 살아왔던 환경은 근검절약을 필수적으로 해야 했음이고 거짓말도 참으로 계획이 필요하고 성가신 뇌의 회전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다.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그 두근거리던 심장의 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다행히.

세월을 입어 이제는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할까 고민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말을 줄이고 상대의 말을 더욱 들어주고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다보면 친구가 생긴다고 한다. ㅋㅋ 그랬더니 쭈욱 그래도 된 줄 알고 자신들 말만 하고 만다.

서로가 길들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불편한 얼굴 표정이라도 정직하게 드러내어 나쁜 습관을 깃들이지 말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위해 배려하는 마음은 귀한 것이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하고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가 연결된다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Saturday, February 15, 2020

The Dignity of Ageing

여인이 나이를 입어 아름다움을 잃게 되면 지혜로워지거나 교활해진다는 말이 있다. 웃을 때는 눈이 보이지 않도록 눈웃음을 짓는 그런 얼굴들이 독을 품은 표정을 드러내는 순간은 느리고도 강하게 깊숙하게 각인된다.

수영 단체수업을 들어가려다 보니 상급반 킥보드가 없는 것을 보게 되었고, 좋은 마음으로 킥보드를 챙겨 우리반 레인앞에 들고 가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킥보드를 들고 가던 터라 내려놓을 때 그만 소리가 나고 말았다. 생각보다 무거웠던 킥보드들이 물기가 있는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상당한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평소에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얼굴들이 화들짝 놀라며 때를 만난듯이 놀란 가슴을 웅켜쥐며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 같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단체 수영이란 운동을 하다보면 가끔은 놀랄 일이 생긴다.  평소에 길러진 관계의 끈끈함에 따라 혹은 숨겨놓은 적대감에 따른 무조건적인 반응이 필터를 걸치지 않고 그 짧은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다.

고의로 주변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놀란 가슴을 웅켜잡고 부정적으로 타인의 실수를 강조하며 확대하는 사람을 어찌 응대해야 하는 것인가.

킥보드를 챙겨 수업준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은 담임 강사라는 훈계아닌 훈계를 들었다. 수업에 임하면서 강사 대신  킥보드를 들고 들어간 선택은 주제가 넘었던 것일까. 칭찬을 받고 싶어서 킥보드를 들고 들어간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따뜻해질려고 선택했던 것 같기도 하다. 주제넘게(?) 킥보드를 들고 들어온 행동에 대한 못마땅함에  이미 당황한 것은 아니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놀래서 놀랐다고 하는 것이 어디 잘못된 일인가!  순간적으로 놀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빌미로 얼굴을 찌푸리며 이러쿵저러쿵 씨부렁대는 모습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선을 지키지 않는 공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럼 여기서 선을 넘어 들어온 사람에 대한 응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품위를 잃고 얼굴을 지푸리는 사람에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해야 했다.
'일부러 그런 일이 아니니, 노여움을 그만 푸시죠~~~'

착한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싶다라고 마음을 정리하였다. 자신들과 친한 사람이 그런 착한(?) 일을 하다가 실수로 소리가 났다고 하자면? 그림이 그려진다.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며 실수로 일어난 놀랄 사운드에 웃어가며 길이길이 기억할 일이다.

자신은 타인의 실수에 관대한가 생각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마음이 쪼그라들어 더욱 고집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두려움과 노여움에 타인의 선한 마음을 악으로 해석한 적은 없었는지 말이다.

이번 일로 '주름살의 품위'에 대해 생각할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으로 마음을 옹졸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더욱 넉넉하게 여유있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멋진 주름살을 만들어 가기로 한다.



Tuesday, February 11, 2020

The Little Thing

'아주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아카데미 4관왕을 달성한 영화 감독, 봉준호님이 언급한 말씀이다. 이곳 방송매체에서 하루종일 그의 업적을 축하하는 방송이 나와도 질리지가 않다. 자꾸만 보고싶은 위대한 소식에 신종 코로나 바이로스로 인한 불안감과 우울함이 좀 덜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능력과 성실함을 겸비한 멋진 사람이 든든한 조직을 이루어 달성해낸 업적에 물개박수를 보낸다. 그의 겸손함과 성실한 천재성이 이 세상에 번져 나와  네모난 방구석에 들어앉은 쪼그라드는 열정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하다.

'혐오'란 단어는 참으로 위험한 단어이다. 열등감과 방어본능에서 비롯되는 몹쓸 단어지만 그와 비슷한 감정들을 가끔 만나곤 하다. 기침예절이 전혀 없는 사람들과 아무곳에서나 자신의 것을 뱉어내는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란 것이 없다. 이런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을 더한 혐오감이다. 그렇다고 다자란 어른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치며 계몽할 수도 없고 그저 구린내 나는 똥을 보듯이 얼른 도망을 후다닥 가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답일 수도 있다. 나 또한 '기생충' 영화에서 상징되는 선을 넘는 것들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소통하고 잘 살기 위해서 지킬 것 지키야 하는 최소한의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미안함과 죄송함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 할 수 있겠다. 아니, 동물보다 못한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사람들을 배출하는 것은 너와 내가 속해 있는 환경과 문화탓일 것이다. 마스크를 사서 매점매석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무식하고 무례한 사람들, 끼리끼리 조직을 만들고 큰 목소리를 내는 갑질하는 사람들, 아무 말도 못하는 얌전한 사람들, 저항하지 않는 편안한 사람들, 침묵을 강요받는 사람들, 침묵을 선택하고 방관하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없다.

기본적인 소양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찌 하여야 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싶어 자신의 것을 돌아보기로 한다.  불의에 저항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럴 힘과 의지가 약하니 자신을 잘돌보기로 한다는 비겁한(?) 변명을 내세우며 주어진 시간을 잘 가꾸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