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28, 2020

The Stream Line

느닷없이, 새로 굴러 들어와  땅파고 빨리 올라간  빽빽한 사람들의 아파트 아래에서 견디며 살아야 할  650년 나이 먹은 느티나무가 걱정스러웠다. 고층 아파트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일조량이 부족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혹시나 아파트를 지을 때 오래묵은 뿌리들을 건드리지나 않았을까. 4월이 되어 벚꽃이 지고도 봄이 오른 시간을 지나 한참이나 초록이 올라오지 않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4월말의 시간에 어린 싹을 들어 올린 고목의 위대함에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햇빛이 부족하고 응달이 드리워도, 650년 오래 뻗어낸 뿌리로 지지하고 흔들리며 올라선 위품있는 굵은 줄기로 버텨내고 어김없이 새롭게 초록의 봄을 들어 올린 것이다.

코로나19의 신규 확진자가 10명 아래로 판정되고 있는 지금은 완화적 사회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아직은 손 소독제가 배치되어 있고 사람들은 인내하며  마스크를 사용하고 있다. 간혹 서둘러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하게 되면 서둘러 코로나와의 전쟁을 끝내버린 그들의 방심에  불편하다. 숫자적으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는 상황에서 마스크를 사용하는 기본적인 긴장감을 풀어도 될 일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수영장에 돌아온 사람들은 쿨하다!  강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함으로 인해 그동안 수많은 나름의 이유로 쌓아놓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내다버리면서 찾아오는  해맑은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코로나와의 전쟁을 하면서 어쩌면 그 하찮은 이유들이 달라 붙어 있을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거리를 둠으로써 서로의 감정들이 쿨해지면서 냉철해지며 무엇이 중한가를 깨닫게 된 덕분이라 생각한다. 생각하면 뭐 그리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로를 멸시할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다보니 살다보니 일어날 수 있는 자잘한 해프닝을 겪었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끔 서로가 현재진행중인 큰일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들을 품지 않으니 살 것 같다. 이해하고 조심하고 배려하는 처음의 마음을 잡고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 우선 좋은 말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 생각과 내 의견을 말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하는 것으로, ㅋㅋ 어느 개키우는 방송에서 보았던 버팅길 수 있는 힘이 빠져 더이상 저항하지 못해 결국엔 길들여지려는 몸과 마음의 자세가 잡힌 어떤 개의 모습이 생각나고 만다. 어느곳에서나 그곳만의 문화가 있는 법이니 존중하기고 한다. 그렇다고해서 내 자신이 녹아 없어지는 것은 아니잖는가. 적응력이 좋아진 더 강하고 우아한 내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나고 있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한다.

다시 시작한 아침수영에서 가장 우선시 해야 할 단어는 '유선형(Stream Line)으로  제목으로 달아본다. 흔들리지만 회복 탄력성을 잃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고 전진하는 기본자세로 임하고 싶다.

Wednesday, April 22, 2020

The Fear

봄날이 봄날같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바람에 꽃잎이 내리는가 바라보니  눈이 흩날리더라. 깜짝이야! 코로나로 인해 날씨도 이상한가! 5월이 코앞인데 눈발이 내리다니 믿을 수 없다.  바지를 뚫고 들어오는 4월의 봄바람은 차가웠다. 몸이 시리는  이 시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홈쇼핑에선 여름용 제품을 판매하고 동네 양품점에선 이도저도 아닌 옷을 빅세일을 한다는 광고를 붙이고 이러다 얼렁뚱땅 여름이 될 것 같아 겁이 난다. 무더운 여름날에도 마스크를 사용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숨이 헉헉 막힌다.

동네 수영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가득이다. 미운정 고운정이 든 사람들의 얼굴들을 마주하면서 일상의 편안함과 안도감 같은 종류에서 오는 온도를 느꼈다. 크나큰 전쟁을 치르고 난 후 모두가 성숙해 진 것일까. 코로나로 인해  강제로 멈춘 일상의 아름답고 추한 그림들을 그리워하게 된 점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코로나'와 전시중이라  미움,시기,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것들로 휘둘릴 수 없다는 얼굴들이다. 마음속의 미운 바이러스들을 제거하고 나온 맑은 얼굴들이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가기로 한다.

아침수영을 하면 좋은 점들이 많다. 그중에 한가지는 수영을 하고 있노라면 세상 잡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저 물을 잡고 댕기고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흘째 아침수영를 하면서 코로나 이전의 생체 리듬을 회복중이다. 드라마 시리즈를 보느라 밤늦게까지 깨어 있었던 신경은 아직은  일찍 쉽게 잠들지 못해서 아침이 피곤한 편이다. 다행히 수영장에 가면 몸이 물을 즐거워한다. 그야말로 다행이다~~~

홈쇼핑에서 꽃잎 자수가 새겨진 살랑살랑한 스커트를 구입했다. ㅋㅋ 입고 나갈 일이 생겼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이쁘게 꾸미고 좋은 사람들과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는 그런 일상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집콕방콕하던 사람들이 국내 여행을 원해서 제주도와 강원도에 있는 숙박시설을 예약하기 어렵다고 한다. 조심조심 마스크를 쓰고 개인위생에 신경을 쓰고 외출을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다. 이러다가 한순간에 다시 '코로나'가 극성을 피우면 어찌 된단 말인가.

비행기 타고 온 코로나는 관리 점검이 되지만 고속도로 타고 다니는 코로나는 사람숫자가 너무 많고 추적이 되지 않는 점이 문제 아니겠는가. 남쪽 땅에 계시는 친정 아버지를 뵈러 가야 하는데 고속도로 휴게소가 걱정스럽다. 반드시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야 할 장거리 운전이고 만에 하나 '무증상 코로나'가 돌아다닌다면 생각만해도 끔찍스럽다.

아무래도 '나'라는 사람은 겁이 많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상상력이 풍부한 것인지 비논리적인 사람이라 그런 것인지 난 겁이 많은 편이다. 락스와 소금물을 사용하는 수영장은 다니지만 온탕엔 코로나 때문에 절대 들어가 앉아 있지 않는 그런 사람 ㅋㅋㅋ 이 나다. 그런데 어찌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말이 된가?

말이 안되어도 할 수 없다. 두려움과 공포는 원래 그런 것이니까 말이다.

그냥 몇주 더 참아 보기로 한다. 이번 주말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질 것 같다. 나라도 참아야 한다.




Tuesday, April 21, 2020

Begin Again~~~

오늘이 몇일이지? 스마트폰을 보고서야 날짜를 알았다. 너무나 쉽게 , 그럴 것을 알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나마 이성을 일깨우는 푸른  불안감을 마비시켜 버린 모양으로 블러그에 글을 남길 힘조차 남기지 않고 무너졌다. 급기야는 완화된 사회적 거리가 실행되어 동네 수영장이 문을 열었음에도 무너진 난 그 소식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코로나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이 사태에,  서둘러 실내 수영장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인지 투덜대며 수영가방을 챙겼다.

난 내가 수영장 문열기를 손꼽아 기달릴 줄 알았다!

4주 강력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동네 수영장은 문을 닫고 동참하였다. '중독'수준으로 자나깨나 수영 생각을 하고 수영을 좋아하던, 선수급 열정을 가진 난 어디로 간 것일까?  몇년동안 다듬어 놓은 몸의 숫자를 지키지 못하고 살이 차오른 모습을 거울 앞에서 바라보는 심정은 '그냥' 받아 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저항하지 않고 받아 들인다. 며칠은 그래도 이럴 때가 아니라면서 근육 운동도 하고 걷기도 하고 단단한 정신줄 잡고 있는 듯했다. 나약한 정신줄이여~~~

스페인 드라마 시리즈, '종이의 집'을 보고 나서의 마지막 일주일 시간동안 몸과 마음을 다잡지 못한 요인이 오늘의 우울함의 주범이라 할 수 있겠다. 수영장 개장 문자는 공부는 하지 않았는데 시험 날짜를 받아든 쓰라린 심란함이라고 할까. 수영장에 가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당장 여행이라도 갈 수 있다면 수영이란 운동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무엇인가.

코로나19로 인해 수영장 문이 닫기전, 에너지 넘치고 건강한 나를 기억하고 있을 몸과 마음의 세포가 문을 닫고 기억을 지운 느낌이다. 균형감을 유지하며 앞으로 쭈욱쭈욱 나아가던 리듬타는 자신을 잊은 것이다. 언젠가 느꼈던 그 무겁고 칙칙한 느낌이 밑바닥으로 부터 일어나 나를 덮어버린 것이다.  만사가 귀찮고 불안하고 우울한 생각만 가득이다. 슬럼프인가 코로나 우울증인가.

그동안 운좋게 '갱년기'라는 말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지 않았었는데 , 수영을 못함으로 인해 갱년기 불안증세와 허무함과 우울함이 기회를 틈타 나를 점령하고 승리의 깃발을 꽂아 버린 모양이다.

수영가기 전날밤 전전반측 잠을 못이루다 스친 생각중 하나는  많은 수영복과 수영용품을 쓸어담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싶었다. ㅋㅋ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밀린 '춤'을 배울 때이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대로 실내공간에서의 집단적인 율동은 위험하다! 할 수 없이 순리대로 하기로 한다. 우선 수영가방을 챙기고 수영장에 가는 것이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수영장 문을 열었다고 하니 하던 것 하기로 하자며 복잡하고 답없는 생각들을 꾸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함이다.

4주만에 만난 푸른 박스안의 물들은 이상하다. 25미터 수영장의 레인이 멀게만 느껴지고 물의 느낌은 연두부처럼 말랑거린다. 일주일이면 수영감각이 깨어날까 의심스럽다. 온몸과 마음이 무겁게 질퍽거린다.  첫날 수영장을 다녀오면 기분이 좀 나아질것 같았는데 더 심란하다. 더 새롭고 재밌는 것이 있을 것 같다. 다른 것을 하고 싶다고 ㅋㅋㅋ

비행기 타고 건너온 무서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전쟁이 끝나면 여행을 마구 하고 싶다!

나와 같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싶다. 코로나가 끝나며 수영장 푸른 박스에 갖혀 있지 않고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자신이 다행이다 싶다.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않는가!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을 바람 하나가 생겼다는 것이다. 푸른 박스에서 건강하게 시간을 잘꾸리고 있다보면 일상의 시간도 리듬을 찾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나은 나를 성장 시키며 풍성하게 할 것이다.

첫날에 무너지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한 둘쨋날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무덤덤한 마음으로 이제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푸른 박스안으로 들어갔다. 건강하고 활기찬 나와 만날 시간인 것이다.

포기하고 그냥 늙어버리기엔 내가 아깝다 그지?



Sunday, April 12, 2020

He has the Plans

'종이의 집'에 사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지금 난 그동안 길러온 근육과 맑은(?) 정신이 나간 상태라 할 수 있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영어가 아닌 외래어가 튀어 나오는 영화는 자막 의존도가 더 높아 멋진 시각적 언어를 더 많이 손실하게 된다. 그나마 익숙한 영어로 되어 있는 영화가 더 훨씬 편안한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볼만한 작품은 읽기를 마친 상황은 이제 친숙하지 않은 유럽권 드라마에도 도전을 해야 할 순간을 맞이 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 드라마답게  투우사의 붉은 빛으로 옷을 입고 '달리' 가면을 쓴 모습이 고풍스러운 스페인의 건물과 어울려 예고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선뜻 선택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드라마 시리즈에 걸려들면 저지를 수 있는 상황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하는 운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쇼파와 한몸이 되어 오랫동안 정지된 자세로 고정되어 있을 것이며, 특히 몰입하여 보느라 눈을 깜빡이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며  기본적으로 돌봐야 할 집안 일이 엉망이 될 것이며 모든 것들이 흐트러질 것이 분명하다.

 지리지리하여 인내심을 시험하고 새롭지 못하여 너무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성적인 장면이 가학적으로 펼쳐져 보고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드라마는 두렵다는 것이다. 뻔하고 새롭지 않은 그런 드라마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말까지 못알아 먹는 상태에서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종이의 집'은 최근에 보았던 드라마 시리즈 중에 가장 매력적인 드라마 시리즈가 아닌가 싶다. 흥분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매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스페인에 다녀온 경험이 더 드라마 속으로 빠져드는 기본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된  투우사의 '붉은 색'은 드라마에서 멋지게 움직였다. 스페인 사람들의 기질이 잘 녹여진 '낭만적인' 모습은 매력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빠른 전개감과 무엇보다도 움직임이 살아있는 촬영기술도 참으로 훌륭하다. 속도의 밀당을 잘하는 감독은 칭찬과 돈을 받을 만하다.

드라마속 캐릭터들은 미워할 수 없는 매력덩어리들이다. 선과 악의 가치가 혼란스러워져 악인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각각의 캐릭터들의 이야기엔 그럴만한 이유들이 뻔하지 않게 혹은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누구나 착한 면이 있고 나쁜 모습들을 뒤로 감추고 살듯이 캐릭터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 시리즈 4가 결정적인(?) 순간에 끝나고 말았다. ㅠㅠ 일년을 기다려야 하나? 마음을 잡을 수 없다. 무슨 시련이라도 당한(?)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쇼는 끝나고 나는 폐인이 된 기분이다. 허탈하고 아무일도 잡히지 않고 리모콘을 들고 다른 드라마에 빠져 앞선 드라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며,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다며, 어쩔 것이나며, 블로그에 글이라도 남겨 나를 달래야 한다며 이렇게 그적거리고 있다. '종이의 집'에 대한 예의이다. 난 바록 '확찐자'가 되었지만 드라마가 안겨준 재미와 감동을 잊어 버리면 안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1oHBcTdKL4&list=RDZTnQzK23R7Q&start_radio=1
La Casa de Papel

After Corona

오늘은 수요일이다. 어제로 넘어간 화요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콕 방콕하는 코로나의 시간은  '책읽기' 좋은 시간이라는 것은 알지만 시간이 널려 있으니 책을 잡고 눈앞에 가져오는 일도 심드렁하다. 만사가 느러지는 때엔 밖으로 나가  '만오천보 걷기'가 제일이다.  마스크, 모자, 선글라스, 무선 이어폰, 스마트폰을 챙겨 나가면 되는 것이다. 코로나가 범람한 어느 나라는 바깥 외출도 금지했다고 하니 여기 이곳은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벚꽃은 환상적이다. 거무죽죽한 나무에 올려진 눈같은 벚꽃 팝콘은 낭만적이다. 봄바람에 꽃눈이 흩날리는 모습은 영화적이다. 유모차에 어린 아이를 태우고 나온 새댁들,  시냇가에 모여 앉아  작은 물고기를 바라보는 젊은 가족들, 벤치에 앉아 마스크 넘어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 수다를 떨며 힘차게 걷는 40대의 아줌마들, 점심을 먹으러 맛집으로 걸어가는 유니폼 입은 아저씨들, 어린 아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젊은 아빠, 홀로 걷는 할아버지, 강아지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 굳이 거꾸러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깐깐한 할아버지, 벤치에 누워 용감하게 햇살 샤워하며 잠을 자는 사람들, 벚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천변에서 밥을 찾아 먹는 오리 가족을 한참이나 바라보는 사람들, 슈퍼에서 장을 보고 바삐 걸어가는 아줌마들...

만오천보를 걸은 다리는 묵직하지만 내친김에 식구들을 위해 장을 보고 들어가야 한다.

장을 보고 들어온 무거운 두 다리 그냥 푹신한 쇼파에 앉아 리모콘을 집어들고 '영화읽기' 하잔다~~~ ㅠㅠ

여기저기 아무리 둘러 보아도 더 이상 볼만한 영화가 없다.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해야 할 모양이다. 지금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는 보고 싶은 영화가 생각이 났다. 더불어 영화관에 '마스크' 관련 불만사항을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마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화를 걸어 상담원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저항를 하고자 했던 미션은 완수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상담원들이 대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무급휴직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마트 폰을 이용해 문자 메세지를 남기기로 한다. 영화관람을 위해 마스크가 필수라면서 왜 영화관 내에서 마스크를 벗는 행위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실내 공간에서 마스크의 필요성에 대한 안내지도가 없는 것인지 문의를 남겼다. 참고로, 아직 문의에 대한 신속한 답장 메세지가 오지 않았다.

'영화관에 그냥 오지 마시와요' 이런 것 아닌가 싶다. '코로나가 무서우면 그냥 영화관에 오지 말지...쯧쯧'

 '뭘 바래요~~~' 하지 않기를 바란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일관성 없는 사람들에겐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허사이고 입만 아프다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그런 사람들에게 순응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실은 애매모호하게 두리뭉실하게 답없는 웃음을 슬쩌기 흘린다는 것이다......


메세지가 공손하게 도착했다.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고 있으나 영화관내에서 마스크 차용 여부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듯 무능하게 대답을 한다, 영화 시작전 직원 한명이 다시 한번 마스크 사용을 권유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넒은 아량으로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해달란다며 고객님의 안녕과 건강을 바라며~~

역시다! '뭘 바래~~~' 그래서 드라마 시리즈를 골라 방콕하기로 한다. 영화관은 젊고 면역력 좋고 간덩어리가 큰 사람이 가는 것으로 정리를 하며 움쯜하고자 했던 저항을 진정시키고 주머니 안쪽으로 집어 넣고 만다.

Sunday, April 05, 2020

The One Step!

'1917'이란 영화는 '봉준호'감독의 '기생충'에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뺏겼던(?) 영화로 전쟁영화이다. 어린시절 '공산당이 싫어요' 하던 그런 반공적인 영화에 교육적으로 자주  노출되었던 탓인지 전쟁영화는 별로다. 어쩔 수 없이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할 때 봐 주곤 하는 영화장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상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인기몰이가 한창이라 보지 않으면 사람들과 원만한(?) 대화를 할 수 없다든지 그런 이유가 생긴다면 챙겨 봤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점령한 지금의 나날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영화밖의 세상이 더 비현실적인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에 굳이 목숨 걸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마스크를 챙기고 관람객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영화관에 가고 싶었다. 이걸 어쩌지? 그러면 안된다며 달콤한 유혹을 뿌리쳤지만 전쟁영화는 스팩타클하게 큰 화면으로 봐야 맛이 나지 않겠는가 하면서 거기다가 공짜로 볼  수 있는 쿠폰이 있지 않겠나 하면서 집근처 영화관에 가고 말았다. (사실 궁금하다. 관람하는 사람이 극소수인데도 왜 영화관은 문을 닫지 않은 것인지.)

'1917'이란 영화는 고급적인 촬영기법에서 나온 현실감으로 기록되기 보다는 '코로나19' 중에도 보았던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397석의 관람실엔 10명 남짓한 간 큰 사람들이 모였다. 대부분 젊은 층으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마스크를 쓰고 관람실에 들어와서는 마스크를 벗고 팝콘도 먹고 입을 열어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이고 만다. 이 코로나와 전쟁중에 영화 관람을 왔으면 마스크를 쓰고 입 다물고  조용히 영화를 봐야 되는 것 아니겠는가! 공간적으로 한참 떨어져 앉긴 했지만 실내공간이란 것을 인식하면  마스크를 벗으면 서로을 위해 좋지 않은 것이다. 관람실에 들어올 때 마스크 쓰고 입장하면 모든 것이 끝난 문제인가? 왜 영화관에서 안에서 마스크를 벗는 것을 감독하고 제제시키지 않는 것인가? 시늉만 낸다! 영화관 안에서는 벗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와요~~~ 이 험할 때 영화관에 들어온 더 늙고 더 약한 당신 책임~~~

영화는 멋졌다! 뻔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뭔가 감동적인 그런 영화로 위험을 무릅쓰고 볼만한 영화였다. 목숨 걸고 볼만했는가 물어 본다면 마스크 쓰고 볼만한 영화였다라고 말하고 싶다. 당장 영화관에 전화해서 불만을 전달해서 시정할 수 있도록 나름의 저항을 해보아겠다. 뭐라고? 영화관에 그냥 가지 말고 살라고? 아니, 전화한통 하는 것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Wednesday, April 01, 2020

3 Seconds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음악'을 틀어놓고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좋은 음악들을 '가까이' 하며 살고자 했던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인내력이 부족해서 공감할 수 없는 음악소리가 나오면 바로 사정없이 채널을 돌려버린다. 뭔가 새로운 것을 흡수하고자 하는 여백의 공간이 줄어든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냥' 받아 들이고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차가 막히는 도로에서 조수석에서 심심풀이로 듣다가 잠들 수 있는 곡이 시기적절하게  좋은 음악으로  생각 나는 것을 보면 난 많이 변했다. ㅠㅠ참고로,  애매한 시간 오후 4시에 나만의 휴식을 침범하는 아래층 이웃의 고상하게 쿵쿵거리는 클래식 음악은 평범하고 보통의 나를 무지 화가 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휴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용서하기 힘들다. ㅋ

젊은 남녀의 사랑 노래는 더 이상 나와 상관이 없다. ㅠㅠ 이제는 징징대며 가슴파는 가사가 들려오는 것이 피곤하고 귀찮다! 어떤 감정에 대한 졸업을 해버린 느낌?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시간을 입어 변한 것이다. 이 나이에 '남녀상열지사'의 가사가 좋다면 아주 이상하게 건강한 것이라며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훨씬 편안하다~~~~ㅋㅋ

점심을 배불리 불리하게 먹고 '만보걷기'를 나갈 때 '이태원 클라스'에서 나온 음악들을 들으면서 그리 싫지 않았다.몇일  듣다보니 가사가 긍정적이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고 참으로 좋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든다. 만화적이고도 드라마적인 내용에 맞춘 노래라서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힘든 역경을 이기고 꿈을 이루어내는 드라마에 걸맞게 멜로디도 신선하고 가사도 건강하고 듣기에 좋고 걷기도 좋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어 건조대에 널었더니 유연제 향기가 보드랍고 향기롭다. 어느새  편안한 향기로 길들여진 모양이다. 이제 맛난 점심 챙겨먹고 마스크도 챙기고 햇빛 내리쬐는 밖으로 나가서 몸과 마음이 더 기분이 좋아지는 산책을 하려고 한다.  '대니얼 카너먼' 이란 심리학자가  사람의 기분은 '3초'만에 바뀐다고 한다. 하루에 3만번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데 놀랍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렸고 그리고 그 선택은 나의 것이다! 아랫집 이웃에게 쫓아가 화내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음악소리를 참아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참고 평화로워지기로~~~ㅋㅋ





Look!

'look'이란 영어 단어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ㅋ '작가미상(Never Look Away)'란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3시간 남짓하는 상영시간 때문이었다. ㅋㅋ실내 자전거에 엉덩이를 앉히고 소중한 몸에 대한 예의로 운동하며 '마음 근육 운동'에 양식도 집어 넣는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영어를 들어주기도 하면서 자막도 보는 영어권 영화와 달리  불어나 독일어로 시작하는 영화는 자막에 의지해서  감상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눈에 부담스럽다. 점점 멀티작업에 둔해진터라,  두 다리로 자전거를 돌리면서 자잘한 자막을 꼭 봐야하는 조건은 영화에서 펼쳐지는 시각적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 불리하다. 그러나 볼만한  영화는 다 끝내버린 것 같고, 선택할 수 있는 괜찮은 영화들은 여기 저기서 상받을 만큼 작품성 있는 비영어권 영화만 남은 지금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더이상 자막 타령 할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미상'이라는 영화제목은 영화가 끝나도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어권 제목을 보고서야 딱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어제목,'Never Look Away'에 비해 상당히 영화주제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미상'이라고 한국내 영화제목을 정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을 터인데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무엇을 영화속에서 놓친 것일까?

생존하는 독일 미술가로 작품가가 가장 높은 '게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그의 주요 이력을 보면,

1932년, 동독 드레스덴 출생
1951년, 드레스덴 미술대학교 입학, 벽화전공
1958~1961년, 마이스터 쉴러로 교육을 받음
1961년, 서독으로 탈출
1961~ 1964년,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공부
1971년~ 1993, 뒤셀도르프 미술대학교수로 재직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으로 영화의 시작은 아름다운 이모 '엘리자베스'와 드레스덴의 미술관에서 출발한다. '히틀러' 문화정책에 열광하는 미술관 가이드는 신의 형상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미술품들을 '퇴폐미술'로 간주하며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보이는 작품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한다. 젊고 아름다운 이모 '엘리자베스'는 조카인 어린 소년 '쿠르트'에게 그러한 작품들도 훌륭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라며 마음의 눈을 열게한다.

하지만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이모는 열정을 주체할 수 없어 보통 사람들이 하지 않고 절대 하지 못하는 행동을 표현하곤 한다.  그녀의 넘쳐나는 감수성과 민감함은 조현병자로 취급받아 인류발전을 위해 처리되어야 하는 열등대상이 된 것이다. 히틀러의  '우생학' 논리에 따라 불임수술을 강제로 받게 되고, 비밀리에 행해진 가스실에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쿠르트'의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으로 나치당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시대흐름에 맞추어 살아남고자   '나치당'에 들어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엔 전쟁이 끝나고 나치당원이었다는 이유로 복직도 하지 못하고 병원 계단 청소를 하는 처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만다. 그리고 결국엔 자살을 하고 만다.

이모 '엘리자베스'를 진단하여 불임수술을 결정해야 했던 산부인과 의사는 '우생학'을 신봉하는 자요, 히틀러의 군복을 사랑했던 일류주의자이다. 우수한 것을 넘어 가장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실력 좋고 냉정한 캐릭터이다. '엘리자베스'가 불임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다 떨어진 눈물 한방울이 자신의 번쩍번쩍한 구두에 묻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한점 부끄럼 없이 흰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내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재수없는 장면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히틀러의 시간이 끝난후 감방생활중에도 자신의 능력을 높은 분께 인정받아 오히려 호위호식하며  죄값을 치루지 않고 교활하고 영악하게 잘 살아가는 캐릭터이다.  '순혈주의'에 빠진 사람으로서 자신의 딸이 열등한 화가 나부랭이의 자식을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비정하게 낙태를 시키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잘도 저지르는 소위 잘난(?)캐릭터이다. '쿠르트'가 드레스텐 미술대학교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여인은 재수없고 냉정하고 교활한 산부인과 의사 교수님의 딸이다.

'쿠르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해당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라는 개인적인 표현이 제거되고 사회적인 이상을 표현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갖지 못했으리 짐작된다. 자꾸만 '나'를 찾는 '쿠르트'를 보고 사람들이 왜 넌 이기적으로 자신 생각만 하느냐고 묻는다. 너를 죽이고 전체를 보고 살아가라고 착하게 말했을 것이다. 그 사회에선 자신이 하고 싶은 '자유'를 찾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서독으로 탈출한 '쿠르트'는 다시 서독의 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심각한 난제와 마주한다. '회화는 죽었다' 사실을 재현하는 일은 사진이 이미 회화의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쿠르트'의 그 막막함을 알것만 같다. 잘 그리는 그림을 포기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하라고 하니 얼마나 방황을 했을 것인가. ㅠㅠ 갑자기 대학원 시절의 난감해하던 내가 떠올랐다.  뭔가 진짜 내것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세상엔 새로운 것이 없는데 자꾸만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 하니 참으로 힘들었다. (지금도 난 이 문제를 풀지 못한 듯 하다. 내꺼를 내놓으면 되는데 거기다가 소통까지 하라고 한다. ㅋㅋ)

캔버스를 찢어도 보고, 물감을 뿌려도 보고, 덧대어도 보고, 거꾸로도 그려보고, 못그린 척 그려도 보고, 그디다가 말아 보기도 하고, 선 하나 긋고 브라브라 말만 씨브렁씨브렁 해보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은 포기하고 잘하는 것 하면서 길을 찾기로 했었다. ㅋㅋㅋ  영화에서 '쿠르트'가 남들처럼 이런 저런 시도를 하며 자기 것을 찾는 와중에 지도 교수님이 스튜디오에 왕립하신다. 좀처럼 해주지 않는 크리티크를 해주시는 것이다. '저것들은 다 니것이라고 할 수 없어. 가짜야!' 뭐 이런 뜻으로 말했던 것 같다. '진짜 니것을 보여 주시게나!' (영화중 가장 몰입도가 높았던 부분이다. 영화속에 내가 있는 듯~~~)

그래서 '쿠르트'는 스튜디오에 있는 실험작들을 전부 태우며 다시 자신으로 태어난다.

회화가 사진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영화는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을 카피한다는 자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가장 가까운 사진을 가지고 보여주고 싶었던 진실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흐릿하게 ,애매하게 표현함으로서 더욱 명확해지는 진실성을 보여주는 그런 작품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삶에 가장 영향를 끼쳤던 '이모''아내''장인어른''아버지' 등 얼굴들이 모여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찰나처럼 스치고 지나가버린 시간의 기록을 가진 얼굴들을 그리다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은 화가의 몫이다.

'진실은 응시하는 것이야' '절대 눈돌려 피하지 말아'~~~


Ella, Oil On Canvas, 2007 by Gerhard Rich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