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14, 2023

당황하지 않고

  가을 햇살이 맑은 날엔 창문과 방충망까지 열고 침구류를 말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나의 시간과 햇님의 무드가 적당하면 무슨 오래된 낭만적인 풍경이라도 만드는 것처럼 창문을 열고 이불을 널고 싶다. 지금은 창문을 열고 이불을 말리면  도시 미관상 좋지 않다고 해서 쉽게 행해질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햇살의 강도가 저항할 수 없이 유혹적인 날엔 할 수 없이 이기적으로다가 방충망까지 열어가며 감행을 하게된다. ㅋ 햇님의 기운을 이불에 받으면 그날은 신기하게도 잠이 잘온다는 것이다. ㅋ 그러나 관리실에서 따끔한 전화가 오기 전에 초록색으로 빛나는 날개를 가진 뚱땡이 검은 파리가 들어와 웽웽거리며 먼저 나의 이기적인 선택에 대한 괴롭힘을 준다는 것이다.

방충망이 열려 있는 상태를 어찌알고 '귀신처럼' 들어온 검은 '파리'가 이상하게 '어리둥절' '혼미백산' 정신이 없다. 그 당황한(?) 날개짓은 집의 절대자 인간인 '나'에게 들켜 '절대절명'의 순간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때,

 파리를 때려 참혹하게 처형할 수 있는 파리채가 있어도, 독한 약물을 뿌려 숨막히게 할 수 잇는 방충 스프레이가 있어도 살겠다고 용감하게 들어온 파리를 그냥 집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내손에 '파리'의 피를 묻히고 싶지도 않기도 하여, 모든 창문과 대문을 열고 '친절한 안내'를 해본다. '당황한' 파리는 나의 친절한 인기척에 더 허둥대다 결국엔 삶의 의지를 꺽은 것처럼 어느 구석진 곳으로 숨어 침묵해 버린다. 결국 빠져 나갈 수 있는 모든 창문과 대문이 닫혀버리고 시간이 흐른다.

며칠 지나 청소를 하다 파리의 죽음을 쓸어담으며, 자신을 둘러싼 닫힌 벽과 열린 문을 구별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결과를 본다. 파리의 운명이었을까? 본능적으로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그 먹음직스런 냄새를 따르는 본능에 충실하였으나, 갇힌 벽으로 둘러쌓여 있는 '유혹'으로부터 탈출하는 법을 알지 못했음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았음이다. 분명 열린 창과 열린 문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침 출근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절대 필요한 스마트폰을 챙기지 않았음을 인지하였다. 지하철은 이미 달리고 시간은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감당해야 했던 것은 '당황함'이었지 싶다.  출근 시간에 지각이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강박이 있는 사람처럼 잘 챙긴다고 챙겼는데, 자신의 대한 의심이 그 짧은 순간에도 밀려 들어왔지 싶다. 

달리고 있는 지하철에서 내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스마트 폰을 챙기면 되는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가방을 열어 찾아보니, 가방안에 스마트폰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적응력과 융통성이 결여되가고 있지 않나 자기점검 들어간다. 대체방안도 있었을 것인데 왜 그리도 혼미백산한 파리처럼 마음이 어지럽단 말인가.

오만과 교만을 경계하지만, 먼저 자신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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