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가끔은 '온 세상이 개판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곤 한다. 지나가는 보행기에 들어 앉아 있는 소중한 '댕댕이'를 발견하고는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 아기'가 강아지 대신에 앉아 있으면 놀랄 정도이다. 여름이면 보행기에 휴대형 선풍기를 좌우 양쪽으로 매달아 털옷을 입은 댕댕이님을 시원하게 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애지중지'하는 소중함의 크기에 놀랄 뿐이다.
동네 산책을 나가는 길에 다양한 견주와 다양한 댕댕이와 마주치는 즐거움도 있긴 하다. 견주와 댕댕이가 닮았다는 생각, 그리고 닮아가는 그 그림이 행운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도 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린 품목이 '개옷'이란 것을 발견하고 아들의 댕댕이가 생각이 나서 반가운 마음에 그만 '개옷이다!' 하는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개옷' ㅋㅋ 단어를 따라하며 웃프게 웃는다. '왜 웃지?' '개'라는 단어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면 어떤 표현을 해야 되었던 거지? 어감이 더 친근하고 귀여운 '강아지 옷'이라고 하던지 아니면 요즘 신생어인 '댕댕이 옷'이라고 했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개를 개라 하지 뭐라 하지? 개가 새끼를 낳으면? ㅋㅋ'강아지'( 이 사건(?) 후로 그냥 '댕댕이'라 부르고 있다.)
이쁘고 기쁨을 주는 '애완견'에서 '반려견'의 위치로 올라선 댕댕이들이다.누군가에겐 삶의 활력소가 되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반려자의 의미로 '반려견'으로 지위를 격상한지가 최근 몇년 동안의 변화였지 싶다. 개를 식용으로 먹고 살았던 그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의 반려견의 위치에 올라선 한국에서 개의 위치를 조명하자면 세상이 참으로 급변한 한 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흔히 심히 마음이 상해 욕할 때 쓰는 그런 오래된 관념의 '개'라는 이쁘지 않은 단어를 쓰면 왠지 죄송하고 안되는 분위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큰 아들과 살고 있는 댕댕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말없이 먹을 것만 밝히고 그리 영리하지 않은 댕댕이지만 보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다. ㅋ 거리의 댕댕이들을 만나면 이상하게 '아들의 댕댕이' 생각이 나고 나름 반응을 하고 싶어진다. 그냥 '주책없이' 한마디라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ㅋ
공원에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보곤 하는 과묵한 댕댕이를 알게 되었다. 견주와 댕댕이가 비사교적인 편이라는 것쯤은 알고는 있었기에 댕댕이에 대한 아무런 예(?)도 갖추지 않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과묵한 댕댕이가 '느닷없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크게 짖는다. 지나가던 '귀여운 댕댕이'와 그 견주 그리고 기타 지나가던 행인들이 놀라고 말았다. '그 개와 그 주인이 똑같다.' 놀라게 했으면 가벼운 목인사라도 하면서 '미안함'을 표시하는 것이 예의이거늘,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견주는 참으로 그야말로 '예'를 모르는 동물수준이라는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예'가 있고 없고에서 차이를 분별하자면 말이다.
뭐지? 놀란 가슴 끌어안고 매너없는 개의 큰짖음의 해석을 하지 않고서는 그 불쾌함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지 싶다. '내가 제일이야. 까불지마, 이 구역에선 내가 최고여!' 견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무런 사과의 제스처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일까. 너무 사랑스런 '금쪽이 댕댕이님'을 꾸짖을 수 없는 것일까.
'감사합니다','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불쑥불쑥' 느낄 때도 있다. 세상이 더 팍팍하고 삭막해 가더라도 그렇다고 그 어두운 분위기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예의가 없고 기본 소양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러다 보니 입을 닫고 피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다시 차라리 말없는 댕댕이를 껴안고 살아야 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세상은 개판이 되어 가는 것이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