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27, 2025

나풀나풀~~~

 출근 전 자체 오리엔테이션 중으로, 삶은 관에 들어갈 때까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방법'을 찾다가 간다는 말이 와닿는 아침이다.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려 지내려면 '소통'이란 것을 잘해야 하는데 그것이 공부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쉽게 되지 않는 것이란다.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는 '상처'의 말을 주고받지 않으려면 어떤 '대처문장'을 마련해야 할까. 

소중한 인격체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선'을 넘지 않고, 일방적이거나 지배적인 대화를 하지 않고 핑퐁 게임을 하듯이 대화를 주고 받는 소통이란 것은 처한 환경에 따라 기술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이'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무난한 '침묵'이란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경우에 하나, 상대방의 자기중심적인 입장에서 내뱉는 말에 어떻게 '나풀나풀한 말'로 지나치며 부정적인 화염에 걸려들지 않을 것인가. 역시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무례하게 훅 들어오는 말에 감정적인 반응 보다는 '긍정적인 배움'을 갖으면 된다고 한다.  내 감정은 나의 것이니, 흔들릴 가치가 있는지 컨트롤 들어가야 한다. '남탓'을 하지 말고, 쉽게 비난하지 말고, 불안함과 속상함을 컨트롤해야 한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Wednesday, March 26, 2025

Somewhere

 하늘에서 억지로 비를 쫘내어 내리는 목요일 아침이다. 간절히 비가 내리기를 바라지만, 번지고 있는 불을 끄기엔 충분하지 않는 양의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도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다. 뿌연 연기를 내뿜고 활활 불타오르는 붉은 얼굴로 바람을 타고 번지는 불을 멈추는 방법은 지금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방법밖에 없는 듯하다. 

새로운 일터에 나가기 전, 모임을 가졌다. 새로운 얼굴들은 나보다 '훨씬' 젊다. 나이가 들면 용기는 작아지고 걱정이 늘어난다고 하더니, 작은 '설렘'과 까칠까칠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정말 나이탓일까 아니면 경험치탓일까. 열린 마음으로 말 수를 줄이고 잘 듣고 배우는 자세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즐기자고......물론 실망스런 일이 왜 없겠는가. 

'역지사지'하며 배려하고, 뭔가 도움이 되려는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다보면, 나의 두려움은 즐거움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고 더 성숙한 자신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행복은 설렘과 실망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떤 행복은 구겨진 포장지 속에 들어있다고 한다.'( 행복은 주름살이 없다, 안가엘 위옹)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실망스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관찰과 관심 그리고 관용의 정신으로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되는 것이다~~~


Tuesday, March 25, 2025

단도리

 며칠째 너무 이른 시간에 잠이 깨는 현상이 습관처럼 굳어지고 있나 보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두려움과 걱정이 늘어난다고 하더니만. 할 수 없이(?) 잠에서 깬 김에 스마트 폰을 붙잡고 유익한(?) 정보로 자체교육에 들어가고 본다. 내심 잠들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정신이 말똥거린다. 난감하다~~~

전전반측 뒤척이다, 할 수 없이 주어진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수면부족으로 기인되는 병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심한고로 그냥 오래 살지 않기로 편한(?) 마음을 먹고본다. 적극적으로 미처 끝내지 못한 블로그 글쓰기를 수정하고, 캘린더에 깨알처럼 적혀있는 할 일들을 챙겨보고, 미루었던 리서치도 하다보니 아침 기상 알림벨이 울린다.

수면 부족 상태로 일어난 몸은 가구 모서리에 유난히도 여기적기 몸을 부딪힌다. '아, 이래서 나이가 들면 '낙상'이란 것도 하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과 골다공증이 심했더라면 뼈들이 부숴질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통증과 함께 느껴진다.  얼른, 불처럼 번지는 한밤중의 각성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라 바람이 휘청거린다. 건조한 바람을 타고 번지는 불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산불에 대한 안전문자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실수로 인한 작은 '불씨 하나'가 건조한 강풍을 타고 '산불'이 되어 불타오르고 있는 뉴스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불을 촉진하는(발화성) 요소가 많은 상록수인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대부분인 산은 활엽수가 분포된 산보다 쉽게 불타오른다고 한다. 동네 근처 산은 대부분이 활엽수라 불이나면 바스락거리며 쉽게 탈 것 같다며 걱정했는데.

예사롭지 않게 휘몰아치는 봄바람 때문에 공원 걷기를 정지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단도리가 되지 않은 종이 박스들이 길거리에 나뒹구는 모습은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스산했다. 미리 미리 준비를 하고 '야무지게' 단도리를 하면 안되는 것인가. 길거리에 나뒹구는 박스들을 주워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놓고 오는데도,  책임지고 단도리를 해야 할 사람들은 별 주의도 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먹고 살려고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데 그깟 종이박스가 차가 다니는 도로에 좀 날아간 것이 별일이야. 그럴 수 있지. 지나가던 내가 주워주면 되는 것이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가끔은 '잘 살고 있는 것일까?'하고 자문를 하다보면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시시하고 그냥저냥한 시간이 쌓여 만든 초라한(?) 모습이 보인다.  '자족'하며 그날그날 기꺼이 작정하고 행복하고 싶은데 말이다. 

몸과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워질 땐 '그냥' 동네 공원을 걷고 볼 일이다. 온 몸을 움직여 제대로 걷기를 하다보면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되고 부글거렸던 생각의 거품이 걷히고, '무엇이 중헌가'하며  내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산 것이지?'

뒤늦은 '후회감'으로 온 몸이 반응을 하며 조바심을 낸다. 주제 파악을 '부정적'으로 하면 생각이 유연성 없이 굳어지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뒤따라오는 무력감으로 인해  '도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마음밭에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너도 반드시 죽는다)란 말뚝을 결정적으로 박으며,  일시적으로 부글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라 앉히고 보는 것이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며, 주위를 돌아보고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소중한 자신에게 '직무유기' 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삶에 집중하고, 무엇이 중헌가 생각하며,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알아채야 한다. 각성하여 여기저기 정보를 검색하고 문의하고 진보하여 다음 단계의 문을 열어 젖히자니 막연하게 부풀려진 두려움이 걷히고 구체적인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방향을 잡았으면 무리하지 않게 천천히 나의 속도로 가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Life is a Matter of Direction)란 말은 예나 지금이나 옳다. 하지만 방향감이 없는 것 또한 삶의 한 모습이니 그리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나름 '업그레이드' 하기 좋은 적당한 때가 지금이며, 늦었다고 생각되는 지금이 제일 빠른 순간!

Sunday, March 23, 2025

알딸딸~

 긴겨울이 데리고 온 봄날은 삼월인데도 느닷없는 오월 중순의 햇살을 내린다. 멀리 바라보는 산은 미세먼지로 불안하게 자욱하지만 나무들이 있는 산으로 향한다. 꽃이 아직 피지 않은 걸 알면서도, 푸른 기운이 솟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계곡에 물이 흐르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양지 바른 곳에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그늘 없는 나무'들은 다르다. 찬란한 햇빛의 사랑을 많이 받은 진달래가 꽃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름도 모르는 나무들이 여기저기 넘어져있다. 비탈길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겨울을 지나면서 쓰러진 것이다. 이 또한 자연의 모습인 것을. 

제철을 맞은 '봄도다리'를 구입하러 어시장으로 향했다. 쫄깃쫄깃한 봄도다리 회는 정지했던 술을 부른다.  봄날에 들떠 술 한잔을 밀어 넣은 세상은 기분 좋게 알딸딸하다. 소중한 몸에 대한' 죄책감'은 몸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콜라비'를 구하러 재래시장에 가기 딱 좋은 날이지 않는가.  

따스한 봄날과 더해진 술 기운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탓인지, 먹어서는 안될 얼굴 큰 호떡을 먹고 말았다. 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알딸딸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봄길에서 분홍 진달래와 하얀 목련을 귀하게 만났다. 아, 봄이다!


Saturday, March 22, 2025

나의 날개

  때로는 '날개'가 되는, '나이로 입는다'는 옷을 잘 챙겨입고 '자신감'을 챙겨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옷이 '자신감'을 주는것이냐고 묻는다면 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장소와 시간 그리고 경우에 맞게 깨끗하고 단정하게, '나다운' 편안한 옷을 챙겨입고 나가면 '여유'라는 것이 생기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끔은 상대방의 뾰족한 태도와  자신의 못난 모습에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옷의 순기능을 체함하기도 한다.

겉단장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는 슬슬 봄처럼 살아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면에는 어쩌면 어린시절의 레이스 양말에 대한 '결핍'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편안한(?) 옷을 입고 어두운 무기력의 시간을 뒹굴뒹굴 지냈던 시간이 내게 있었다. 옷장의 옷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옷에 대한 아무런 욕망이 생기지 않았던 겨울의 시간을 통과한 나는 옷들을 챙겨보며 '나의 날개'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패션은 '자신감'인데,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는 나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기꺼이' 슬기로운 노력이란 것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추진력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다. 먼저 새옷을 구입하기 앞서, 새로 출근할 환경에 어울리는 실용적이면서도 자신을 자신답게(?)하고 품위와 인격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옷(사람의 특징, 직업, 성격)을 옷장을 뒤적이며 찾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충동구매를 방지할 수 있기도 하다.

매너 전문 강사 '재클린 위트모어'는 '자신을 최고로 보이게 하는 것은 허영심이 아니다. 대신 자기 개선에 관한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패션은 트랜드를 따르는 것이고 스타일은 옷을 입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나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어야 하는데......먼저 소중한 몸을 건강한 '명품'으로 만들고 볼 일이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태도와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말을 따라 난 지금 '옷'으로 날개를 달고 있는 중이다. 


Wednesday, March 19, 2025

걸어서 출근

 '걸어서 출근' 하고 싶은 바램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지 않고 두 발로 걸어서 출근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물론 결단을 내리기 위해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는 셈법을 해야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이기로 한다. '단기 계약'으로 인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적응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지만, 이 또한 나의 삶을 정체되지 않고 더 성숙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어버리기로 한다. 

'축하합니다~~~~~'란 문자를 마침내 받은 것이다. 여기저기 지원서를 제출하며 간절히 바라던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이다. 미리 나이탓을 하며 포기하지 않고,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회를 만들어낸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어찌 망설임과 흔들림이 없었겠는가. 그렇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다!

교육현장에 나가기 전, 무엇보다도 '인내심'을 품은 '기다림'을 장착하고 본다. '스턴버그'(심리학자)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서 완전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를 열정친밀, 그리고 헌신을 언급했다고 한다. 열정을 품은 마음에 '인내심'을 장착하고, 친밀감은 '기다림'을 장착하고, 헌신엔 '열정'을 장착하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로 다짐해 본다. 



Tuesday, March 18, 2025

난 누구?

 '면담'을 시작하면서 자기 소개를 간략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하며  짧게 대답을 하면서 내 마음이 붉어졌다.  전공과 경력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한 단어, '열정'이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한 것일까. 더 나은 자신을 위해서 '일'이 필요한 것이고, 개인적인 경험과 능력을 고려할 때, 어떤 도움과 기여를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노라 분명하게 말해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Monday, March 17, 2025

적재적소

 올해 들어 처음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다. 작년의 처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초긴장감 대신에 뭔가 불안한(?) 싱숭거리는 느낌은 있다. 3월 중순을 지나고 있는 시간이 무색하게 하얗게 젖은 눈이 내리고 있는 아침이다. 새벽 배송으로 날아온 짭짤이 토마토, 노란 참외, 콜라비를 샐러드에 넣어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하느라 몸을 바삐 움직이다보니, 뒤숭생숭한 마음이 좀 가라 앉아 마침내 맑은 물이 찰랑거린다.

두꺼운 겨울 옷을 챙겨입고 동네장에 가서 신선한 먹거리를 사가지고 와야 한다. 지난번 '돌미나리'의 향긋한 맛을 잊지 못한 것이다.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 말씀대로, '끓인 물에 넣었다 얼른 빼내는' 데치기 요령을 준수했더니 신기하게 질기지 않았다. 물이 끓으면 대담하게 가스를 끄고 미나리를 신속하게 넣었다 빼야하는 '초'시간을 지켜야했던 것이다. 겨울을 견디고 나온 부들부들하고 향긋한 미나리는 오래전 내 정원의 끄트머리에서 키웠던 미나리가 푸릇푸릇했던 봄의 풍경으로 데리고 간다.  

 며칠만 꽃샘 추위를 지나고 나면, 노란 산수유가 작은 꽃들을 내밀 것이고, 진달래, 목련, 개나리가 찾아 올 것이다.  급속하게 달라지는 기후변화로, 짧은 봄에 이어 '긴 여름'이 11월까지 이어질거라고 한다. 어서, 창문을 활짝 열고 '봄맞이 집정리'를 하며 불필요한 것을 버려야 하는데, 봄은 정말 천천히 온다.  더 간소한 삶 속에서 불필요한 물건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는 시간이다. 창문을 열어젖힐 그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적재적소의 '정리'라는 것을 해보는 것으로. 허기진 소비생활 자제하고 각성하자고! 

The Brutalist

영화 '더 부르탈리스트(The Brutalist)'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르탈리즘'의 건축 개념을 알아보니,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 1950년~1970년)을 가지고 있고, 기능성과 효율성을 극대화 시킨 건축양식으로 '장식적인' 외장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건축물'이란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하고, 최소화된 창문 노출, 절제된 장식, 단순한 기하학적인 건물 구조의 특징은 '삭막한'이란 단어를 충분히 떠오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미국 유학시절, 영어 언어 연수를 받던 건물이 바로 부르탈리즘적 건물이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글리'란 말을 사용하며 거친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말하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 군데 군데 적절한 장소에 푸른 화분과 이쁜 꽃이라도 놓여있지 않았더라면, 바로 근처에 사슴이 노니는 숲이 있지 않았더라면 등등의 만약의 경우들을 생각해 본다.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영화에서 나온 대사처럼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게 만드는 기능도 갖고 있는 듯.

 영화의 주인공,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유대계 헝가리인 천재 건축가로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에서 살아 남아 겨우 낯선 미국땅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각박한 생활고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어찌저찌하여 자신을 알아본 부유한 자산가를 만나 자신의 철학이 담긴 부르탈리즘적인 건축물을 짓는 과정이 담긴 영화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항상 그렇듯이 '예술'은 서포트를 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어야 더 빛나는(?) 것으로, 사업가 해리슨의 제안으로 지역사회에 남길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컴뮤니센터(도서관, 극장, 체육관, 예배당)를 짓기로 하지만,  늘상 돈 줄을 잡고 있는 '물주'는 투자자로서 현실적인 껄끄러운 소리를 내고 때로는 슬그머니 무례하고,  무시하고, 얼굴이 없는 짓을 한다는 것이다. 천재 건축가의 앞서가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건축 설계는 주위의 일반적인 사람들과 불협 화음으로 삐걱거린다. '창의적'이란 기존의 것을 부수는 나오는 새로운 것이기에 치루어야 할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고통'과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약'을 하고야 마는 우리의 천재 건축가님!

영화 상영 시간이 무려 215분으로, 중간에 15분 '인터미션'이 있었던 영화로 기억 남을 것 같다. 감독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 어려웠다.  건축 양식으로서 영화 제목 보다는 ' 누가 부르털리스트인가' 하는 물음을 'brutal'(잔인한, 야만적, 동물을 닮은)이란 단어와 함께 생각해 보았다. 

영화가 주인공의 삶을 전기적인 전개로 하다보니 '실화'인가 싶었는데 '허구'라고 한다. 

Saturday, March 15, 2025

FireFly

 https://www.youtube.com/watch?v=qh55_mIidz8

나는 반딧불, 황가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내가 난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테니까~~~


Friday, March 14, 2025

꼬르르 꼬르르

'꼬르르 꼬르르' 소리가 나지 않는데, 이른 저녁을 챙겨 '꾸역꾸역' 삼키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였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자체는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것임을 잘 알지만서도. 기다리던 문자는 오지 않았다.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는 거절 문자를 보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탈락'이란 단어를 굳이 사용하는, 배려심' 없는 문자를 받는 것보다는 거절의 '무소식'이 차라리 정신적인 타격감이 덜 한 것 같긴 하다. 

'꾸역꾸역' 몸 안으로 음식을 밀어넣으며, 거절의 침묵을 인정하고, 속 쓰리지만 건설적으로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슬기로운(?) '포기'와 '방향전환'이란 단어를 염두에 둬야 할 시간이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뜬금없이 전화가 울린다. '면접'이 잡힌 것이다. 아직은 포기할 시간이 아니다. 

Thursday, March 13, 2025

The New has come

 공원 걷기를 오가다 보게 되는 노인 요양원의 간판에 쓰여있는 '백살 공주와 어른 왕자'는 늘상 이상하게 자동적인 오독,  '뱃살 왕비와 어른 왕자'로! 인식된다. '노년'의 나이인데도 '공주와 왕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의문도 들기도 한다. 한 평생 수고롭게 살았던 무수리 노인들이 공주와 왕자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란 뜻일테지만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들이다.  

'노년'이 행복하려면 '열정'을 갖고 '낙천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삶에 대한 열정을 내려놓는 순간 무기력해지고 외로움과 고독에 쌓여있는 씁쓸한 현실을 마주할 것이라는 것이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려면, '사회적인 관계망'을 잘 만들어야 할 것이고, 활기찬 생활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건강'이 허락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쯤은 이제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따닥따닥 붙어있는 여러 간판 사이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란 성경 문구가 쓰여있는 교회 간판이 보인다. '봄'이란 단어가 바로 생각났다.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아직도 묵은 잎을 버리지 못하고 서 있는 '단풍 나무'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별같은 잎 모양으로 존재감을 키운 단풍나무이기에 묵은 별을 떨쳐내는 일이 가장 어렵나 보다'란 생각을 했었다. 물론 자신의 '때'가 아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기도 했겠지만, 혼자 묵은 잎을 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지금 이순간 때를 모르고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열정'과 '집착'을 어떻게 구별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내려놓고 어떤 것은 버려야 하는 것이지?

'낙천'이란 단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들을 즐긴다란 뜻이라고 한다. 좀 더 낙천적으로 자신의 열정을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하다. 때를 따라 묵은 잎을 내려놓고 새순을 피우고~~~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날그날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도록 살면 되는 것을. 백살공주는 그렇고, 뱃살 왕비는 되지 말기로 하자며 두 팔 흔들며 씩씩하게 걸음걸음하여 '새순'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Wednesday, March 12, 2025

부스럭거리는 날엔

 


 찬 바람이 부스럭거리는 날에도 햇살이 그저 내려와

 더 깊은 곳으로 그저 뿌리를 내려 어두움을 붙잡고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시간을 입었지.


 차디찬 빗줄기에 바스락거리는 묵은 잎도 함께 내렸지.

 맨 몸뚱이로 흔들리며 

 봄은 그저 시간을 벗고 움틀거렸지.




Tuesday, March 11, 2025

호떡 대신 아메치스

 

기꺼이 이른 점심을 챙겨먹고, 공원 마실을 가는 대신에  바쁜 걸음으로 유일하게 신발 굽을 갈고 허리띠 구멍을 내주는 곳으로 향한다. 늘상 하던 대로 하지 않고 약간의 변화를 가져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으쌰으쌰 힘차게 걸어가는 것이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봄꽃처럼 피어나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손님이 없는 틈에 눈을 감고 졸고 있는 사장님이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에 깜짝 놀라신다. 한참이나 면밀하게 자로 구멍의 위치를 체크하고 구멍을 낸다. '이제 뱃살이 더 빠져도 끄떡 없어'하며, 최적화된 맞춤 허리띠를 가방에 넣으며 자신에게  든든한 지지를 보낸다.  다음 목적지인 '시장'에 들러서 요즘때나 먹을 수 있다는 '대저 토마토'를 구입하러 간다. '먹고 싶다'는 내 몸의 아우성을 들어 주기로 한다.

따뜻한 '호떡'을 입에 물고 달콤한 행복함를 삼키는 얼굴들을 보며, 내심 부러워진다. 호떡도 먹어도 되는 삶이 부럽다. 오랜 습관처럼 '꿀꺽'하며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지만, 지금은 '대저 토마토'가 훨씬 유익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토닥거린다. '삶의 변환기'에서 버려야 할 것은 달달한 '호떡'이고 취해야 할 것은 '토마토'이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다육이'를 파는 나이드신 어르신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봄햇살에 찬란하게 빛나는 귀엽고 예쁜 다육이를 쳐다보며 행복한 상상을 한다. 나 또한 가던 걸음 멈추고 한참이나 그 아름다움에 끌려 있었나 보다.  '저 보암직도 하고 어여쁜 '아메치스'를 '봄 마중' 삼아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 봄마중으로 '버리기'를 먼저 하려는 야무진 의지는 흔들리며 그만 '들이기'를 하고 만다. 

'아메치스'의 학명은 'Amethystinum'(자수정)으로 영어로는 'Lavender Pebble'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둥글둥글하고 매끄러운 얼굴이 아기 얼굴이다. '다육이'의 특성상 배수에 신경을 쓰면 된다니, 해가 드는 창가에 집을 주고, 물을 잘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둥글둥글한 잎이 쉽게 떨어져 나가고 만다. '내가 뭔 짓을 한 것이지?' 걱정이 되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원래 그렇단다. 잠시나마 '집착'으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달콤한 호떡은 먹지 못하지만 아메치스와 토마토를 눈과 마음으로 먹을 수 있는 내 삶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

Monday, March 10, 2025

애타는 봄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애타는 사랑', '열정'의 꽃말을 가진 동백나무(camellia)의 붉은 꽃을 보기를 희망했다. 대략 11월 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2~3월에 만발한다고 했는데, 이상기온으로 인한 기후의 변동탓인지, 3월 초순의 남쪽의 동백은 만발하지 않았다. 

아직도 황량한 겨울로 있는 풍경 속에서 붉은 동백꽃이 빼꼼하게 얼굴을 내미는 모습은 귀한 일이라 스마트 폰을 들이대고 만다. 잎은 두껍고 반짝거리며, 꽃이 떨어질 땐 한 송이씩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꽃은 '천천히' 꽃를 피울 모양이다. 봄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을 모르고 봄은 무심한 듯 천천히 오는 중이다. 


Sunday, March 09, 2025

시간

 늙은 아부지의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아 가슴이 아프다. '또 오겠다'며 떠나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은 가슴이 저리는 일로 잊혀지지 않는다. 꿋꿋한 나의 아부지가 늙으셨다. 절대 그럴 일 없어 보였는데,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실 것 같았는데 '시간'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몸의 '노쇠'로 근육이 사라지고, 뼈의 마디마디가 삐긋거리고, 모든 욕구가 사라지고....... 여기저기 아픈 몸을 안마의자에 앉혀놓고 듣는 TV속 세상 이야기는 어질어질하고 피곤하다.  마을회관에 가보아도 동갑내기 사람들은 없고 말 동무를 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외로움이다!! 노쇠로 인한 신체활동이 줄어드니 '밥맛'도 없고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않으니 '활력'이 없는 악순환을 피하지 못하신다.  

때가 되면 들고양이들이 아부지의 앞마당에 모여 생존 울음소리를 낸다. '밥 주세요 야옹야옹~~~' 먹고 살려고 들이대는 고양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쯤 나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계실게다. 그리고 텅빈 집으로 돌아와 이른 점심을 혼자 드실 것이고, 혼자 있는 외로움이 두려워 마을 회관으로 향할 것이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저녁을 혼자 대충 드실 것이고, 이른 잠을 청하시고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어두움의 시간을 길게 보내야 할 것이다. 

새로울 것 없이, 어제와 같은 오늘의 단순하고 반복되는 생활로 인한 기억의 순서가 흐려지는 것을 경험하는 나의 아부지는 당황스러워 보이신다. 꼿꼿하던 나의 아부지도 시간 앞에서 어쩔 수 없다. 




Thursday, March 06, 2025

매화

 갈까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생각보다 연약한(?) 자신의 몸의 '회복력'에 대한 염려로 인한 것이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까지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후로, 자신을 살피며 조심조심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을 고려하면 '휙' 하고 가방을 챙겨 떠나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다. 

 환경이 바뀌면 수면을 잘 취하지 못하고, 장시간 차 안에서 앉아있어야 할 기다란 허리에 대한 부담감, 건강한 컨디션을 유지해야 할 개인적인 의무와 책임감, 등등의 이유는 남쪽에 계신 친정 아부지로 향한 방향감을 흔든다.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무엇이 중한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정 아버지의 목소리는 외롭고 고독하다. 나 자신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고 친정 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이다. 비도 오지 않고 적당한 봄날이 아닌가. 봄의 향기를 품은 매화꽃이 선구자처럼 긴 겨울을 뚫고 나오고 있을 것이다. 


Wednesday, March 05, 2025

이 나이에?

 '평범한 나날들이 더 행복하도록'이란 광구 문구가 마음에 와 닿는 아침이다. 마음이 어수선해서 하루의 루틴을 바꿔서 아침부터 집안 일을 하고 말았다. 바삐 몸을 움직이고 나니 한결 낫다. 

계획을 하고, 성실히 준비하고, 용감하게 도전하는 '지금의 시간'에도 난 '두려움'과 '의기소침'을 갖고 있다. 기승전'이 나이에?' 란 물음과 자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은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성실함'으로 열심을 내어 도전해 보는 것이다. 결정은 그들이 하는 것이지만 도전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자신의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보면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시간을 갖는 자체도 더 나은 자신을 위해서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제의 공원은 봄을 데리고 온다는 '춘설'이 젖어든, 촉촉하고 부드러운 땅을 내게 내놓았다. 폐타이어로 만든 인조 길을 밟지 않고 '흙'을 밟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같은 것이다. 공원의 운동장에서 맨발로 '문워킹(moon walking)을 하고 있는 두 세람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지 싶다. '무릎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뒤로 걷기'를 하는 것일게다. 평평한 운동장에서 어떤 장애물의 걱정없이, 뒤로 걸으며 평소 사용하지 않은 허벅지 뒷부분의 근육과 장딴지 근육을 튼튼하게 하는 뒤로 걷기는 멀리서 보니 '문워킹'이다. 

행복한 나날들이 더 행복하려면 '건강'을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 '내 나이가 어때서?'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오늘이 가장 젊고 좋은 날로, 주저 앉아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쓰담쓰담 해본다. 


Tuesday, March 04, 2025

 

베란다 창에 내다놓은 양파가 푸른 싹을 밀어올린 모습을 보니, 지난 날에  양파의 '생명력'을 치열하게(?) 그리고자 했던 더 젊었던 열정이 생각난다. 냉장 저장된 양파를 햇빛이 드는 베란다 창가에 두웠으니 푸른 싹이 나고 말 일이다. 껍질을 벗긴 매끈거리는 하얀 양파를 비닐 랩을 입혀 냉장고에 넣어야 했던 것으로, 알뜰 주부로서는 '앗' 소리가 날 일이다. 습기롭지 못한 주부! 그러나 푸른 싹을 들어 올리는 양파는 경이롭다. 


Expendible

존경과 열린 마음으로 '봉준호' 감독님(감독. 각본)의  '미키 17'을 본 후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expendible'(소모품)이란 단어이다. 언제든 대체되는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미키(복제인간, 기억과 성격을 보존)의 이야기이다. 로맨틱 영화(트와일라이트)로 인상을 남겼던 배우, '로버트 패틴슨'의 캐릭터 변신(남루함)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지 싶다, 특히 그의 낭만적인 목소리가 '찌질하게' 들릴 때의 신선함(?)이 그렇다.

너무 기대를 했을까 아니면 감독님이 너무 많은 것을 신경을 썼을까. 뭔가 아쉬운 그런 느낌을 안고 영화는 끝이 났다. 어찌어찌하여 살다보니(마카롱 가게가 망해서) 할 수 없이 '소모품'이라도 연명하는 신세가 된 미키는 죽고 또 죽어도 프린터에 복제되어 다시 살아난다. 죽어도 다시 프린트 될 수 있는 미키에 대한 '인간존중'은 없다. 미키 자신도 그닥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듯 하다. 

 그래도 좌충우돌 안간힘을 쓰며 본능적(?)으로 살아보려는데 죽음은 유쾌한 것은 아니다. 둥글둥글한 우주 괴물들이 살려주는 바람에,  죽어야 할 '미키17'이 새로 복제된 '미키 18'을 맞닥뜨림으로 영구 삭제되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여자친구가 '미키 17과 18'을 모두 데리고 사랑하고 싶어하는 설정은 헐리우드적 발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블랙코미디'인가 하는 생각을 엉뚱하게 했지싶다. '웃을 장면이 없었는데......', 관람하는 내가 '유머감각'이 떨어진 모양이다. 

 영화 속, 독재자 '마셜'역은 '헐크맨'으로 알려진 '마크 러팔로'란 배우가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부담스러운 캐릭터였다. 전형적인 나쁜 놈으로 악인으로서 매력이 일도 없는, 일도 고민하지 않는 그런 나쁜 놈(평면적인 캐릭터)으로 '흥미'가 떨어지는 캐릭터로 과하게 나왔다. 너무 뻔해서 감히 '지루함'을 느끼고 말았다. 

난 개인적으로 SF 영화의 너무 엉뚱한 상상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둥글이 괴물들의 전투(?)장면은 상상 이상으로 멋졌다. 복제가 될 때마다 약간은 다른 캐릭터로 부활한다는 설정으로 복제된  미키 18의 대범성은 미키17의 찌질함과 비교되는 것으로, 결국은 폼나고 멋진 '희생'을 하며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끝이 났다. 영화는 과학인 모양이다. 동일한 화면에서 두 미키(일인 이역)가 연기한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로버트 패틴슨'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엔딩 크레딧에서 '플랜 B 엔터테인먼트' 제작사의 '브레드 피트' 이름올 보았다. 잘생기고 멋진 '브래드 피트'가 잘 늙고 있고나~~~


Sunday, March 02, 2025

몸('Listen when your body talks')

비가 내리는 3월초의 하루는 Body Concert(바디 콘서트)를 보기 좋은 날. 봄을 데리고 오는 비가 내리는 날 현실적인 생각을 뒤로 하고 예술의 전당(토월 극장)으로 향했다. 평소에 애매모호하고 비정확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팀명에 어떤 매력을 가졌다고나 할까.  '앰비규어스(ambiguous)''란 팀명(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은 참 신비하고 아리까리하고 때로는 답이 없어 보이는 단어이다. 

자유롭기에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해진 틀이 없는 애매모호한 색깔로 현대무용을 15년 동안이나 끌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였다. 어떤 고정된 틀에 박히지 않고 실험정신으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을 시도를 해보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현대 무용을 보러 관람하러 가는 사람이 아닌데도 궁금증이 일었던 것은 팀명이 주는 정체불명의 아우라였다. 

붉은 연휴에 내리는 얄미운 비는 봄을 데리고 오는 중이다. 교통 혼잡을 염려하여 이른 출발을 한 연유로 긴 시간을 '예술의 전당'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기분 좋은 기다림이다. 덕분에 천정이 높은 예술의 전당 이 주는 웅장하고 우아한 '공간미'를 즐겼던 같기도 하다. 다른 극장의 문이 열리자 들뜬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포토죤에서 인증샷을 찍으려고 긴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은 기꺼이 인내심을 지불하는 모습이다. 

  '아무런 대사 없이' 오직 '몸'으로만 표현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대화로서의 몸짓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이 설레는 일'이다. 처절할 만큼 온 몸을 이용한 몸짓은 어떤 뜨거운 감정을 일으킨다. 음악에 맞춰 온 '몸'을 움직여 표현하는, 집요하리만큼 최선을 다하는, 생각보다 더 치열한 몸짓은 어떤 묘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관중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하고 손바닥이 불이 날 정도로 박수를 친다. 그야말로 관중석에 앉아 박수를 치는 나는 최선을 다해 온몸으로 반응했지 싶다. 이 또한 나이가 드니 힘들긴 했다.^^ '멋지다!'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확실한 틀에 갖히지 않으면선도 자신이 선택한 것(자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실행해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열정'과 '성실함'이었을 것이다. 아픈 어깨를 들어 기꺼이 박수치며 환호하면서 난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지 싶다. 아직 난 느낄 수 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에너지를 온 몸으로 흡수하여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