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필요할 때
살다보면 타인들과 이야기를 섞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순간이 있다. 당돌하고 무례하게 상대방을 가르치는 말투와 타인의 고통을 잠시도 공감하지 않는 속좁은 모습은 내가 '침묵'을 지키지 않아서다. 말을 섞지 않았으면 방자한 무례함과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추한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섞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당해보면 알게 된다. 노페인 노게인~~~
살다보면 타인들과 이야기를 섞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런 순간이 있다. 당돌하고 무례하게 상대방을 가르치는 말투와 타인의 고통을 잠시도 공감하지 않는 속좁은 모습은 내가 '침묵'을 지키지 않아서다. 말을 섞지 않았으면 방자한 무례함과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추한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섞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고? 당해보면 알게 된다. 노페인 노게인~~~
요즘 제철인 오이를 채썰고, 양파를 채썰어 식초 물에 알싸한 맛을 우려내어 준비하고, 마늘과 매콤한 베트남 고추가 우러난 자글거리는 올리브 기름에 코팅을 한 새우를 가지고 월남쌈을 해먹었다. '아보카도'와 '고수'를 넣지 않았음에도 아삭한 오이와 양파의 시원함 달콤함이 어울려 그런대로 괜찮았다. 지혜로운 용기를 내고 살짝 머리와 몸을 움직인 노력이란 것을 하면 저녁 식탁이 즐거워지는데 그것이 매번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 배불리 먹지 않고 소식을 해야 한다는데 낮에 먹은 수제비의 탄수화물이 선을 넘어 또 다른 탄수화물을 잡아 당기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쉽게 만족하지 못하고 갑자기 숨겨놓은 짧짤한 스넥이 먹고 싶다는 것이다. '위장이 하란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배가 더 튀어 나오고 허리가 없어지는 것이지.' '그래도 먹어야겠어.' 잠깐이나마 행복을 누렸을까 무슨 마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먹고 있던 맛있는 과자를 엎질렀다. 다행히~~~ ㅋ
쓰레기통에 먹던 과자를 과감하게 버리고 나서도 한참이나 소중한 몸에 대해 저질렀던 '죄책감'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 단순하게 소박한 삶을 꾸려야 해!' '제발 먹는 욕심을 다스리게ㅠ' 하루 동안 집어넣은 탄수화물이 염증을 만들 수 있다는 염려가 일었다. 이럴 때는 얼른 푸른 공원으로 나가야 한다. 울퉁불퉁한 공원 길을 걷고 있자니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를 용서해야 해^^'
하늘과 땅 사이에 초여름 저녁 푸른 바람이 살짝 불었던 것 같다. 금계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어라, 하룻밤 사이에 '접시꽃'이 피어버렸네! 건널목 가장 자리에 무심하게 위치한 접시꽃은 노란 금계국 조직에 시선이 뺏겨 아무런 눈길조차 끌지 못하고 그냥 있었는데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짜잔~~~' '벌써?' 6월경에 피기 시작한다는데 한국이 더워지고 있나보다. 한여름이 아닌 지금 초여름의 접시꽃은 뙤약볕에 지치지도 않고 타오르지도 않아 선선하니 보기에 좋다. 초여름 초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처음'이란 순간은 연약하지만 아름답다. 접시꽃도 가슴이 뛰고 있을까. 건널목 접시꽃이 피었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비가 온다기에 서둘러 '석모도'에 다녀왔다. 5월의 장미 축제가 이곳저곳에서 한창이지만 강화도와 석모도를 이은 석모대교를 달려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오래전 세기가 바뀌기 전, 새우맛이 나는 '새우깡'을 준비해 석모도로 향했던 뱃길은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함께한 여행이었다. 푸른 바다 위 푸른 하늘로 뿌려지는 '새우깡'에 전투적으로 날아오는 갈매기들의 모습을 보고 신기해 하던 어린 두아들을 위해 새우깡을 투척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번진다. 하늘을 높이 날아 먹잇감을 구하는 갈매기들의 '야성'을 위해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도 어린이들을 동반한 사람들이 새우깡으로 갈매기들을 부르는 모습을 보면 뭐라 비난할 수 없다.
'보문사'가 위치해 있는 산의 진입로의 예사롭지 않은 경사를 쳐다보고는 서둘러 이른 점심을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리 준비한 우리 동네 맛집 김밥을 챙겨왔음에도 불구하고 절 입구에 '산채비빕밥'을 파는 식당의 바글거리는 풍경에 눈길이 가고 만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광경이 가장 좋은 인테리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식당 규모가 크고 워낙 위치가 좋다보니 관광 버스 손님이 단체 계약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것을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알았다. 주인 부부는 친절했지만 나물은 약간 짜고 오색으로 구색을 맞춘 푸른 색 나물은 있는 힘을 다해 씹어도 질겼다. 살짝 실망을 하고 계산을 하고 나올려고 하니 여주인이 다정하게 말을 건다.
'이만하면 되었다.' 여주인의 친절함에 말을 할까말까 망설였다. 영수증을 주며 식후담을 묻는 친절한 여주인이 나의 품평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맛있게 먹고 간다'는 말을 하고 그냥 가야하는데.....'. '푸른 색 나물 하나가 약간 질기다'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괜히 말했을까? 재료 구입, 가게 세, 인건비...등등의 내가 알 수 없는 지출이 있어서 질긴 나물이라도 끼워서 파는 것 아니겠는가. 푸른 나물의 줄기를 잘 씹지 못하는 내 치아를 탓하고 말걸 그랬나. '향기로 먹는 나물이라서...'라는 말을 돌려 준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향기도 못느끼고 씹느라 혼쭐이 났다. ㅋ
포기하지 않고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눈썹 바위' 밑에 있는 마야석불좌상의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았다. 강화도 갯벌을 바라보고 서둘러 사진을 찍느라 소원을 비는 것도 까먹었다. ㅋ 계단을 오르면서 이미 소원이 이루어졌다. '건강'을 더 신경써야 한다...' 조용하게 머물면서 스님의 목탁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그리고 침묵을 들어야 했는데 사람들의 개인적인 소리가 여기저기다. 속세에서 묻혀오는 소음을 견디고 날마다 수행하는 고충을 생각한다면 입장료를 받는 것은 마땅할 수도 있겠다 싶다. 고즈넉한 절의 풍경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곳은 없을까.
석모도 수목원엘 갔더니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1시간 정도 조용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앞뒤로 사람이 없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인공적인 관리가 수준급이라고 하기엔 뭔가 약간 부족한 감이 있어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 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좋았다. 인적이 너무 없어서 살짝 무서운 느낌도 받긴 하였다.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 김에 민머루 해수욕장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저녁 노을'을 보고 싶었는데 바다도 없고 뻘판이고 나무도 없어 그림자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앉을 곳도 없다. 어린 아이들을 동반한 텐트족들이 해변을 가득 채웠다. 어른들은 컵라면을 먹고 아이들은 조개를 파고......
파도 소리도 없고 조용히 숨어 있을 곳이 없다. 후퇴~~~ 집으로~~~ 집이 좋다.
태어난 김에 그냥 재미있게 살다 가라고?
그런데 재미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재미있게 살더라도 책임질 것은 책임지라고?
어렵다~~~~~~
맑은 하늘에 흰구름이 둥실둥실 떠있는 주말을 보내서 좋았다. 흐린 날을 보내보니 맑은 날의 소중함을 더욱 알 것 같다. 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곳으로 달려가면 귀한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함께 있다.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하게 바르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어린 아이들은 바닷가 모래로 성을 쌓고 물놀이를 한다.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인가.
바닷가 텐트 구역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한적한 모래밭에 누워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려웠다.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불편하다. 텐트 아니 파라솔이라도 있어야 한다. 중고 사이트에 저렴함 가격으로 판매해 버린 텐트와 등받이 의자들이 생각났다. 따가운 햇살을 가릴려고 양산을 펴고 검은 큰 우산을 펴고 그늘을 만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자니 뭔가 그렇다. 없어 보이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무지 불편하다. 바닷바람에 우산과 양산이 날아가는 피하기 위해 잠들면 안된다.ㅋ
태양을 향해 고개가 꺽어지는 파라솔이 부럽고 텐트 안에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리고 내겐 없는 어린 아이들까지 부럽다. ㅠㅠ 족한 삶을 살기로 했는데 그만 두 눈이 보고 만다. 뭣이 중하냐고? 바닷가에 앉아 있노라니 텐트와 파라솔의 '그늘'이 중허네! 다음엔 소나무 숲이 있는 해변으로 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일렁이는 물욕을 정지시켰나 보다.
집으로 오는 길에 구입한 유명 소금빵은 버터에 젖은 빵이었다. 어떻게 버터 범벅인 축축한 빵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일까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내 취향이 수준 미달로 이상한 모양이다. 뭐, 커피에 버터 가득한 빵을 먹고 있노라면 배부르고 좋을 듯 싶기도 하다. 포장도 종이 봉투에 그럴싸 하지 않은가. 버터 범벅인 소금빵을 감당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것 인정하고 만다. 그려, 내탓이다. 다시는 사먹지 않는 것으로 유명 소금빵의 소감을 마침했다.
뭣이 중하냐고? 바닷가에선 그늘이 중요했다. 그리고 편안한 집으로 돌아오니 먹는 것이 중요하다. ㅋ
부처님 생신이라서 붉은 휴일은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겨 나간 동네 공원은 비 소식에 인적이 드물다. 비를 맞는 붉은 장미는 방수로 아직 끄덕없는 듯 자신의 시간을 즐기는 것 같다. 하얀 찔레꽃을 보며 나의 정원에 심었던 주황색(코럴) 노랑색 장미를 한참이나 생각했다. 찔레꽃과 접목을 시킨 장미는 겹겹이 쌓여있는 우아하고 고귀한 영국 로얄 장미와는 다르게 찔레꽃의 단순함과 귀여움을 갖고 있었고 장미의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기억 속에는 찔레꽃 어린 가지를 뜯어 껍질을 벗겨 질겅질겅 씹어 단맛을 즐겼던 어린 순간도 생각난다. 달디단 사탕이 귀할 때 이야기다. ㅋ
벚꽃과 개나리 라일락과 철쭉이 피고 지고나니 5월의 시간은 그야말로 푸르다. 하얀 꽃들을 늘어뜨린 아까시아와 이팝나무가 꽃길을 만드는 시간 속에 장미가 꽃의 여왕답게 붉게 꽃봉우리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온 세상이 푸른 오월에 붉은 장미는 매혹적이며 이기적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끄떡없이 피고지고 붉은 그 길을 갈 것이다.
겨울 내내 묵은 흔적으로도 담을 붙들고 있던 담쟁이들이 어느새 반짝이는 새잎으로 담을 더듬어 붙잡고 기어 오르고 있었다.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다. 어제를 벗고......
쭈글쭈글한 옷을 입고 나가면 안될 것 같아 서둘러 다림질 판과 다리미를 찾았다. 옷까지 다려입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움직임이다. 무늬가 없는 옷이다보니 옷장 속 비좁은 곳에서 한쪽으로 쏠린 옷주름이 감춰지지 않는다. 약간의 노력이라는 것을 해도 괜찮을 듯 싶어 평소와 다른 부지런함을 챙겨 보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스팀 다리미는 쭈글거리는 주름을 편다. 마술이다! 그리고 훨씬 낫다!
우울증이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이라고 한다.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그럴 때가 있는 것이다. 옷을 챙겨서 다림질을 하는 행위는 우울감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셀프로 칭찬할 일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 보다는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은 주글거리는 옷의 상태를 알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소중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옷을 단정히 하여 자신에게 예의라는 것을 차린 나를 사랑한다.
다림질이 무색하게 앉았다 일어났더니 참을 수 없는 무게감으로 굵은 주름을 만들었다. ㅋ 그래도 내가 내려다 볼 수 있는 앞면은 아직 무사하지 않는가. 앞이라도 반듯해서 다행이다. 부정적인 면면의 주름진 생각을 멈추고 얼른 스팀 다리미가 지나간 듯 활짝 피고 웃고 보자고^^
어제를 떠나서 오늘을 사는 것은 '무소유의 삶'이라고 한다. 어제의 껍데기들을 툭툭 털어버리고 오늘로 푸르게 일어서야 한다. 일단 베란다 창문을 열고...시원한 바람과 함께 새 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온다.
오늘 하루는 '소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가지고 먹고 쓰고 날로 하루를 꾸려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자꾸만 부질없이 채운다. 어제의 서운함과 못마땅함을 얼른 내다 버리고 오늘을 푸르고 맑게 채워야 하는 것 알지만 자꾸만 모질하다. 조용히 몸을 움직이고 입을 닫고 묵묵히 할 일을 하다보면 고요한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내 마음의 정원에 '긍정의 씨앗'을 심는 것을 멈추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마음을 고쳐먹고 내게 주어진 길을 자연스럽게 마치는 것이다. 때때로 넘어지고 주저앉아 뿌리지도 않은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갖게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법.
잡초에게도 배울 것이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잡초는 까다롭지 않고 민감하지 않고 강인하다는 것이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유연하게 생존하고 번성한다는 것이다. 동네 공원에 아무렇게나 무심하게 피어있는 붉은 크로바(토끼풀) 꽃들이 생각난다. 흰색 토끼풀의 꽃으로 꽃반지를 만들고 놀았기에 붉은 토끼풀의 꽃이 신기하기도 하다. 잔디 커터기가 지나가면 드러누워 깍이지 않던 크로바!
잔디밭에 줄기차게 차오르던 밉상 흰토끼풀들을 캐내던 어제의 난 40대로 젊었었다. 잔디의 천적인 크로바는 비료를 뿌려도 잘 죽지 않아서 잔디뿐만아니라 나의 천적이기도 하였었다. 지금 여기 난 나의 푸른 잔디밭이 없기에 토끼풀도 귀엽고 민들레 꽃도 귀엽다. 소유란 이런 것이다. 내 정원의 잔디밭 속의 민들레와 흰토끼풀은 밉상이고 길가의 민들레와 크로바는 신기한 것이다.
어제를 떠난 오늘 난 잔디 깍은 냄새도 그립다. 내것이 아니니 그리운 것이지. 이웃의 잔디 깍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었던 거 거의 잊었다. ㅋ 그려, 떠나니 그리운 것이다.
전날 밤, 다음 날의 날씨를 체크한 후 출근할 때 입을 옷을 챙겨 놓았는데 느닷없이 아침 마음이 변덕을 부려 다른 옷을 '부랴부랴' 뒤적거릴 때가 있다. 바로 오늘 아침이 그렇다. 쫓기는 마음으로 옷을 코디를 하다보니 즐겁지가 않다. 나이를 먹은만큼 나답지 않은, 편하지 않는 옷차림에 민감해진다. 특별할 일 없는 금요일이지만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오늘을 내가 최선을 다해 나다운 옷으로 기념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요며칠 살이 차오른 모양이다.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라서서 확인한 숫자는 먹은만큼 성실하다. 울퉁불퉁 못난 부분을 가려줘야 하는데 마땅하지 않아 입었다 벗었다를 여러 차례 했더니 자신의 변덕스러움과 결정장애로 인해 피곤함이 느껴진다. 아침 '루틴'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긋나게 아침을 시작하는 마음은 불안한 것이다.
'상상력'이란 단어는 참 어려운 단어임에 틀림없다. 옷장에서 오늘에 맞는 옷을 추리는 것에도 나만의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배양할 수 있는 문화적인 풍토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무난하고 무채색의 옷'을 추려놓은 아침의 옷은 금요일을 기념하는 것과 꽤 거리가 멀다. 아무 일 없이, 튀는 일 없이 그런 조용한 무난한 하루에 맞는 옷차림!
입을 다물고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이 취해햐 할 옷은 무난함의 틀을 갖추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길들이고 있다. 무채색의 옷을 입으니 편하긴 하다. 시간과 장소에 맞는 옷을 골라입는 것도 슬기로운 선택임이라는 것을. 나 또한 시간과 장소에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난 할 수 있으니까.
오래 묵은 친구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냥 동네 공원에 나가 걷기로 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묵직한 '첼로' 음악을 들으며 걷자니 맑고 푸른 날이 감사하다. 며칠 장마같은 비가 내린 후 오월의 세상은 더 푸르고 맑다. 귀찮지만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밖으로 나가길 잘했다 싶다. 틈만 나면 자연으로 걸어 가야 한다.
나무가 초록으로 물이 차오르는 시간 우리는 바다로 갔다. 바닷가 그늘진 곳에 앉아서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바닷가의 많은 사람들을 바라 보았다. 아들의 댕댕이는 말이 없다. 검은 아이라인을 두른 동그란 눈동자는 단순하다.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며 손짓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것이기고 하고 환경이 바뀌어 낮잠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탓으로 만사가 피곤한 것이다. '여긴 어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ㅋ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 모자도 없이 2시간 동안 교육 활동을 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림자 하나 없는 운동장에서 광합성을 하며 태양을 반길 그런 나이 아니다. '태양을 피하는 요령'없이 노출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이 세상엔 당연한 것은 없지만 눈치가 살짝 보이긴 하였다. 유전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발달되어 있는 신체적 결점을 고려할 때 눈치보고 그럴 때가 아니다. 용감하게(?) 가방 속에서 비상용 우산을 꺼내어 쓰는 것을 선택하였다. 운동장엔 모자를 쓴 사람과 모자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우산을 쓴 사람이 있게 된 것이다.
그림자 하나 없는 드넓은 운동장에서 수업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냥 자외선 폭탄을 맞아야 했던가. 아니다! 친절한 사전 정보가 있었더라면 아니 경험자였다면 미리 모자를 준비하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일본 여행길에 구입한 가벼운 우산이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산이라도 꺼내어 그늘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난 큰 일을 못하고 '눈치보는 가장자리'에 있는 모양이다.
우산을 쓰고 쏟아지는 자외선을 가리고 참여하고 있는 상황을 비난하고 싶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자유이다. 난 선택을 하였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수업에 임하는 태도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내리쬐는 자외선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피부의 광노화뿐만아니라 소중한 눈에 자외선이 들어가는 것을 방어해야 한다. 한 손으로 우산들고 참여했다 하여 못할 것 하나도 없다. 그 모습이 불성실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당신의 것! 난 소중한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누구는 모자 쓰고 누구는 눈치보며 수업 중이라 땡볕 받으며 서 있으라는 것인가.
가장자리에서 오늘도 눈치보며 잘 견딜 모든 사람들에게 화이팅이다. 가끔은 저항해야 한다. 당연한 것은 없다. 길들여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