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29, 2019

but No Matter~~~

새로 찾아온 아침은 건조하다고 한다. 특종을 급하게 알리는 아침뉴스는 우울하고 축축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람선이 크루즈와 부딪혀 한국인 관관객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가슴 섬뜩한 뉴스다. 몇년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람선을 탔던 밤과 겹쳐지며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다뉴브강의 밤은 중세건물을 돋보이게 하는  찬란한 조명으로 낭만적으로 빛났건만, 그 찬란한 야경을 보기 위해 밤을 기다려 유람선을 탔던 기억이 난다.

구명조끼를 입었을 리 없다. 구명조끼를 입고 유람선을 탔던 사진이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안전 불감증이란 그런 것이다. 수영장에서 인명사고가 난 후 얼마나 긴장된 가드워치를 하던가! 불편할 정도로 눈을 번쩍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며 주시하는 모습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슬슬 평소 그대로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전요원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 앉아 있으면 뭐하겠는가! 손에 든 핸드폰에 시선을 뺏기고 앉아있는 것은 가드업무라고 말할 순 없다.  '안전' 운운하며  뾰족하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푸른 박스속의 내가 가진 현실인 것이다.

사고가 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찍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더 더럽고 무서운 것이라고 경험되기 때문 아닐까 한다.  나말고 안전의식이 뛰어난 그 누군가가 나타나 신고하고 개선하는 그런 일을 해주길 바라니 '안전 불감증'에 걸린 푸른 박스속의 풍경은 좀처럼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알아서 각자도생~~~ 누구도 믿지 말고, 자신도 믿지 말고 조심조심 운동하다가 가시란 말씀~~~

아침운동을 하러 가는 길에,  안전을 지키기위한 규칙을 위반할만한 유혹들이 있다. 차들이 오지 않는 길에서 무단행단을 하고 싶은 유혹이 가장 크다 할 수 있겠다. 마땅히 있을 만한 곳에 행단보도는 왜 없는 것일까하는 불만이 생길 정도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무단행단을 하고 나또한 그런 사람들 속에 한명이다. 자랑스러운 사실은 아니지만 길을 가다 그 지점에 이르면 행단보도 하나를 그려 놓고 싶을 정도이다.

왠만하면 신호들이 있는 곳에서 길을 건너도록 자신에게 자체주문을 걸지만 매일 아침 그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오늘 아침은 반드시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길을 건너기로 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나부터 바꾸는 것으로~~~

Moving Forward, Not Down

'처음으로 돌아가기'
아침 물가를 걸으며 처음으로  본 것처럼 오월의 꽃을 바라 보았다. 가장 날씨가 좋을 때가 아닌가! 며칠전 비가 내린 후 초록은 깊게 푸르고 흔들리는 노오란 코스모스는 귀엽다. 빨간 양귀비가 아침햇살에 선명하게 빛난다. 새로운 푸르름! 모든 것들이 새로운 천변을 오늘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아침수영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돌아가기'란 말을 가슴판에 간직하고 물속에서 부유하려고 했다. 물속을 질주하는 것도 신나는 즐거움이지만 처음으로 수영을 시작한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음으로 한동작 한동작을 성실하게 이행하도록 자신을 감독 주시하였다.

물을 효율적으로 잡아 추진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 제대로 물속 동작을 해보는 시도는 자신만의 만족을 가지고 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지켜보며 자신의 잘못된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의 연습이 허락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우고 싶었던 턴동작 중에,  배영에서 평영으로의 전환턴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해 보았다.  그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의 만족감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 시도를 해보았다. 해본만큼  나아가는 것이다. 아직도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타인들의 시선과 타인들의 주는 기쁨에서 자유하여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있음이 다행이다~~~






Tuesday, May 28, 2019

into Myself

아침물가를 걸어 운동을 하러 갈때면 이만하면 족하다는 행복감이 든다. 노란 코스모스가 한들 한들 웃으며 피어있는 길을 걸을 때면, 졸졸 흐르는 맑은 시냇물 소리를 듣자면, 푸른 나무가 만드는 그림자를 밟으면 이만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도 철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침묵하고 싶은 아침이었다. 서둘러 자유수영을 하러 가야만 했다. 

'말'이란 필요하면서도 때로는 불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전시회 참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작가로서의 나를 흔들어 깨울 어떤 기회들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알고 있지만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동안의 습관을 떨치기가 어렵고,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당연함에 의미를 주지 못하는 부끄러운 면이 지금의 내게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벽돌 하나를 그려놓고 가슴 뜨겁도록 벅찼던  그 순수했던  나를 불러내야 한다. 


Monday, May 27, 2019

May Rain

'마늘 장아찌'를 이쁜 유리병에 담아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저장을 마친 오늘의 시작은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장아찌용 햇마늘'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보라 붉은 빛이 도는 마늘을 구입해 흰속살이 보이도록 야무지게 다듬어서 아린 맛을 빼내는 소금물에 담구고 다시 24시간이 지난후 그 물을 버리고 마늘만 건져 내었다.  절여진 마늘을 유리병에 넣고 방부제 역할을 한다는 소주,식초 설탕, 약간의 소금과 간장이 들어간 새콤달콤 짭쪼름한 물을 그 위에 부었다. 한달간 숙성시키면 맛난 삼결삽과 함께 먹는 나름의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발효숙성을 돕기 위해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창고에 넣어두는 것으로 마늘 장아찌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강은 왜 함게 넣는 것인지 검색을 해도 이유가 나와 있지 않다. 궁금하다! 어쨋든, 생강 껍데기를 벗겨 편을 썰어 함께 집어 넣는 노력을 하는 최선을 다했다. 몇년만에 담아보는 마늘 장아찌인가! 10년만에 돌아와 제일 먼저 행했던 것은 작가로서 갤러리를 탐방하는 일이 우선이거늘, 익숙하지만 낯선 이곳에 돌아온 난 김치를 담고 장아찌를 담았었다.

그리고 5년이 바람처럼 지나가버렸다. 더 이상 장아찌를 담는 일이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알뜰하고 살뜰한 전업주부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 모양이다. 마늘 장아찌를 하려고 하니 프로주부선수들은 이미 마치고 난 후인 것이다. 장아찌를 담는 사람과 담지 않는 사람으로 여인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마늘 장아찌를 담고 나니 길가에 있는 노란 참외가 그냥 보이지 않는다. 다음 도전은 고급진 '참외 장아찌'를 해서 먹고 싶다는 것이다!

마늘 장아찌의 효능을 찾아보니 만병 통치약이다! 항암작용에 피도 맑게 해주고하니 삼겹살에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뿌듯하고 든든한 정보로 더욱 마음이 그득하게  차오른다. 스마트폰 시대에 사는 여인들은 현명해진다. 정보를 공유하고 더 편리하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질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고하니, 검색을 하여 신속하게 얻어지는 고급진 정보에 감사함이 찾아 들 때가 많다. 물론 거북목이 생기는 부작용도 있지만 말이다.

지난밤, 버스를 타고나가 영화를 보고 천변을 걸어 집까지 걸어올 때 오월의 밤이 행복했다. 커다란 잉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힘찬 매기들이 자갈을 건드리며 꿈틀거리고,  회색 두루미가 집중하여 먹이를 낚아채는 오월의 밤은 살아있다. 노란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나고 붉은 장미와 힌장미가 담을 타고 올라가는 풍경은 낭만적이다. 도시의 풍경은 달라지고 있다. 고층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니 천변을 걷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작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역으로 작은 존재들이 저렇게 높은 건물들을 쉽게, 빠르게 올려 세우니 말이다. 

'알라딘'이란 영화속에서 여주인공인 공주가 부르는 노랫말이 요즈음의 시대를 방영하는 것 같다. 얌전히 뒤로 빠져 조용히 '공주'처럼 있으라는 요구에 그렇게는 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는 쎈공주인 것이다. 알라딘의  램프에서 나온 '지니'가 세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며 말하라 하면 뭐라고 할까 상상해 본다. 겉은 바꿀 수 있어도 내면의 것은 바꿔줄 수 없다는 말은 생각할 수록 깊은 말이다싶다. (개인적인 소원 세가지는 비밀로 하기로 한다.)

내면의 것을 풍요롭게 할 것들을 생각하기로 하자. 내것이 아닌 것들은 흘러가게 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간이다. 비가 온 김에 묵은 먼지들을 깨끗이 씻어내야 하는데 비가 간질간질하게 온다. 내 마음을 모르는 척~~~







Wednesday, May 22, 2019

The Green Time

등산용 스틱 하나와 모자 그리고 등산용 신발을 신고 아카시아 향기가 아직 남아있을 뒷산으로 향했다. 지난 주말 귀한 봄비가 내린 후 초미세 먼지가 가라앉은 오월의 시간은 맑고 투명하지만 아카시아 향은 옅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하는 그 향기에 대한 기대를 품고 나무들이 서있는 산을 향해 걸어갔다.

연분홍 진달래꽃을 보러 올라갔던 이후로 산은 푸른옷으로 갈아 입었다. 진달래가 진한 향기 필요없이 봄의 핑크쇼를 시각적으로 하였다면, 아카시아꽃은 푸른색에 파묻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한 향기를 품지 않으면 꽃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산은 온통 녹색으로 푸르다. 아카시아 진한 향내에 빠져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맑은 날이다. 이런 날도 있구나!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르자니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종종 보인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젊은 사람들도 보이고 무심한 옷차림에 어울리게 신경 전혀 쓰지 않은 신발로 앞마당 산책 나오듯이 나온 사람을 보고 산에 대한 예의를 차린 나의 정성어린 차림새가 무색해지기도 한다. 그런들 어쩌랴 각자 즐기면 되는 것이라며 흙처럼 편안한 마음을 가졌지 싶다.

나의 몸무게의 중력을 들어올려 한걸음 한걸음 옮겨 산을 올라가는 일은 물속에서 부유하는 것과 다르다. 현실적이라고나 할까! 반백년 사용한 연골이 닳아져서 느끼게 될 통증을 상상하는 벌대신 오늘의 나를 사랑하고 즐기기로 했다. 올라갈 수 있을 때 올라가는 것이다. 연골 닳아진다며 방구석에 앉아 있으면 오늘의 나는 어찌 되는 것인가 상상해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걱정인지 알게 될 것이다.

등상용 지팡이가 얼마나 고맙던지요~~~ 뒷산은 만만하다. 초입구 오르막만 견뎌내면 뒷산은 편안한 길이다. 고요한 산에 산바람이 살랑거리고 귀여운 새소리가 난다. 삐롱 삐롱 삐로롱~~뿅뿅~ 새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름다운 새소리가 환상적으로 들리는 것은 좋은 징조이다 싶다. (지금 이순간 아파트 창문틈 사이로 무시무시한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ㅋㅋ 깍각 까아아악~)  땅의 부드러움을 딛고 1시간15분 정도 걷고 난 후 난 행복했다.  다양한 나무들이 함께 서있는 5월의 푸른 숲은 아름답다.

아침신문에서 유명 브랜드, 토레스 와인 명장과의 인터뷰 기사가 떠오른다. 최고의 와인은 어떤 것이냐고 기자가 묻자,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 최고이다' 라는 답을 내민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며 다른 사람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산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큰나무 작은 나무들을 품고 살아가는 것처럼,  바다가 되고 싶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뒷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Monday, May 20, 2019

Considerations in the White Box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지역의 작가들이 모여 전시회를 한다고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전시를 접근도가 쉽지 않은 곳에서 짧은 기간 동안 한다는 것이 먼저 아쉬웠다. 작가가 전시를 하지 않으면 작자가 된다는 우스개 소리가 무섭게 다가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혹시라도 나를 나답게 할 수 있는 내적 나침반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의미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귀찮은 마음을 억지로라도 떨쳐 내었던 것 같다.

예술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다면 전시장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 뚜렷해지는 장소였다.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는 수집가 혹은 경제적 여유를 주머니에 넣고  작품들을 둘러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혹하기에는 전시회 위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작가들과 작가와 관련된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덜컥 들어서고 말았다. 우리들만의 잔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지 싶다.

전시 작품을 바라보는, 길러지기도 한 비판적인 시선이 무뎌지고 그냥 순수하게 바라보게 되는 자신의 변화에 조금 덤덤해졌다. 화가에게 꽃이란 유혹적이라는 것을 나 또한 경험했었던 일이라 그림으로 피어있는 상투적인(?) 꽃그림을 그런대로 용서할 수 있었다. 무언가 신선하고 무언가 독특한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들이 비슷비슷하고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어떤 기술적인 능력을 뽐내는 전시회라면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고유하고도 창조적인 면에서라면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이 없었다는 평을 한다면 스스로가 교만방자한 것일까. 자신의 분신처럼 쏟아냈을 작가들의 열정을 무시하는 발언이 될 수 있기에 삼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만, 시각적인 이미지가 난무하는 세상에 굳이 그만그만한 작품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게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난 아직도 그 거창한 '아티스트 병'에서 치유받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만 순간인지도 모른다.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붓을 들고 서성거렸을 그 아름다운 마음이 시간과 정성과 열정으로 피어나 캔버스 위에 꽃으로 집으로 나무로 바다로 그렇게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많은 작품들이 비좁게 걸려있는 점은 전시회의 품위를 떨쳤고, 조명 또한 치명적이었다. 수묵화나 디자인 작품에나 사용할 명확한(?) 조명을 빛조절을 해야 할 분위기 있는 작품에 마구 쏟아 붇고 있는 것은 부끄럽게 다가왔다.  어느 섹션은 작품마다 조명을 신경쓰고 어디는 천장의 플랫한 불빛 아래 부모없는 애들처럼 희멀겋게 걸려있는 짜증나는 분위기를 둘러보자니 화가 은근히 치밀어 올랐지 싶다.

작품들을 걸 때 어떤 생각으로 배치를 한 것일까? 조직에 공헌한 작가님들의 작품을 눈에 띄는 자리에 걸고, 관계되는 중요한 작가의 작품을 배려하고 그리고?

작품 전시회에서 조명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주제에 따라 혹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조명을 맞추어야 하고, 그림의 배치 또한 흐름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작품이 독립적으로 빛나야하는 것은 이상적인 '당신의 생각'이라는 , 씁쓸한 지금 이곳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분노하라~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될테이니~~~
맞다! 작가는 개인전을 해야 하는 것이고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려, 그래야지~~~

Thursday, May 16, 2019

The Flow~~~(어떤 흐름)

'실리콘 부항 사용법'
삶은 아프면서 깨우치고 그렇게 사나보다. 나이테가 많이 생긴 여인들이 조그마한 실리콘 부항들을 부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쳤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어깨에 얼룩 덜룩한 흉한 자국들을 입고 다니는 것에 별 관심없이 쳐다보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요즈음은 정형외과에 어깨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글을 읽으면서 무거운 내 어깨는 외롭지 않았다.

어깨통증만 없다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무겁고 신경쓰이는 통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있는 난 '실리콘 부항'을 구입해 성실하게 사용을 하였나 보다. 무식 용감하게 물에 퉁퉁부은 살에 실리콘 부항을 붙이고 사우나장에 들어가는 행동을 성실하게 이행하였나 보다. 어떤 의식이라도 되는 듯 습관을 만들고 그러다 좋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그만 장시간 부항을 뜨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 이것은 무엇이지?'
부항의 피부와의 과도한 접착(?)으로 인해  민감한 피부가 찢어지는  새로운 통증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앞서 경험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가르친다. '그러시면 안되십니다~~~'

집에 돌아와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스마트폰에서 검색을 하였다. 오남용의 결과이다! ㅋㅋ

'왜 사용방법만 있고 주의사항은 없었을까?'

삶은 아프면서 배우는 것 맞는 것 같다. 이제 분홍빛 실리콘 부항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래도 이 물건이 있어 어깨가 든든했다는 것 기억하기로 한다. 수영을 하며 동반될 수 있는 통증을 이런 작은 물건이 열정을 지지하고 통증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위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과하지 않게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수영을 단조롭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수영은 극단적인 기쁨과 행복감을 선사하기 때문에, 나는 때때로 일종의 홍홀경에 빠지곤 한다. 나는 스트로크 하나하나에 매번 몰두한다. 그러면 마음이 자유롭게 둥실 떠오르며 넋을 잃어 트랜스에 빠진 듯한 상태가 된다. 나는 수영 말고는 그처럼 강력하고 건강한 도취감에 빠져 본 적이 없으며, 수영을 하지 않으면 금단증상을 느낄 정도로 중독되어 있다.
......

수영에는 본질적인 선, 말하자면 리드미컬한 음악 활동이 내재한다. 그리고 수영에는 부유, 즉 우리를 떠받치고 감싸는 걸쭉하고 투명한 매질 속에 떠 있는 상태가 주는 경이로움이 있다.
-올리버 색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극단적인 기쁨과 행복감, 일종의 홍홀경, 몰입, 자유, 강력하고 건강한 도취감, 금단증상, 중독, 리드미컬한 음악활동, 부유, 물에 떠있는 경이로움~~~ 올리버 색스님은 멋있다. 작가님의 수영에 관해 서술한 모든 단어를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다.








Tuesday, May 14, 2019

How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뿌연 창밖을 바라본다. 비가 내리지 않는 봄은 불안하기까지 하다. 점점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는 하나의 현상일까 걱정이 들어선다. 뉴스에서 가장 깊은 해저를 탐색했는데 그곳에도 인간이 버린 패트병이 있는 서글픈 사진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활 쓰레기가 가득 채워질 때 어떤 죄책감과 불안감이 든다. 어떤 묘안을 짜내어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자연을 해치는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을까. 좀 더 덜 먹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으려나 엉뚱한 생각이 들고 만다.

그렇고보니, 오늘은 화분에 물을 주어야 하는 수요일이며 수영 개인렛슨이 있는 날이기도 하다. 시간과 물질적인 투자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은 '힘을 빼는 일'이다. 무엇보다 '주제파악'이란 단어로 빠알간 열정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국가대표' '선수급 포스' 이런 활기찬 기운을 내뿜었던 정열이 방향을 잃은 느낌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반백년을 살았으면서 젊은 청춘인 줄 알고 덤비는 무모한(?) 체력에 사람들이 걱정을 한다. ㅠㅠ 몸이 아프면 알아서 조심하고 내려놓게 되는 과정을 걸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극복하고 덤비는 무식용감한 에너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에너지 하나가 길을 잃은 것은 분명하다. 알게 모르게 내려놓기를 조언하는 사람들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결국은 나이타령을 하며 '건강'을 챙기자며 과한 에너지를 내려놓게 되는 그림이다. 그래서 내려놓으니 힘이 빠지고 하기가 싫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을 끌고 나갔던 등불 하나를 스스로 꺼버린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유학시절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 주위사람들은 나름 각자의 조언을 했다. 그 주위사람들 말대로 시간을 꾸렸다면 나다운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음을 분명하게 난 기억한다. 그 어떤 경지의 이상에서 나의 것을 찾아낼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과정은 편안하고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침운동을 하면서 '집중' 혹은 '몰입'이란 단어가 주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 확실하다.  '욕심'이란 단어로 시기와 질투어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견디며 지금까지 내안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잘 이끌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이순간 나이탓을 하며 내안의 붉은 열정을 끄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새롭게 고안해 내어야 하는 때에 도착했다고 본다.  건강을 해치지 않고 즐거운 수영을 하기 위해 어떻게 최적화된 영법을 완성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도전앞에 있는 것으로 받아 들이기로 한다.

무모한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수영이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축적된 몸에 변화가 있듯이 수영영법에도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화분에 물 주러 간다~~~


Thursday, May 09, 2019

Could Be~~~

베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오월의 풍경을 보면서,  부처님은 참 좋은 푸른 날에 오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침신문에서 부처님과 관련된 글을 만나게 되었다. 원래 옳고 그름이 없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을 잠시 들여다 보았다. 내가 옳으면 남도 옳을 것이고, 남이 틀렸으면 나도 틀릴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일 겪게되는 타인들과의 만남은 삶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균형감각이 무너져 부정적인 감정들을 말과 행동으로 행할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백만년 살 것도 아니고 인간이란 부족하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부족함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데 그 부정적 에너지는 마음속에 들어와 집을 짓고 울타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타인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용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래, 그럴수도 있겠어~~~'





The Pain

전화안부만 하면 '어디 아프다'란 이야기를 평생 듣게 된다면 전화거는 사람 마음도 몹시 무거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증'이란 단어를 남은 삶 동안 친구처럼 함께 해야 할텐데 아프다란 말을 하지 않을 벌써 자신이 없다. 반백년 넘은 몸은 이제 아플 때도 된 것 아니던가. 아픈 것을 아프다 하지 않고 뭐라고 말해야 하나 긍정적인 대안을 찾아봐야겠다.

'몸은 어쩌신가요?'
'그냥 그렇지,  나이먹은 몸은 원래 아프고 그런 것이야.' '병원에 다녀왔는데, 나이치고는 건강한 편이라고 하더라~~~ 조심해서  몸을 다루라고 미리 신호를 주신 것이지~~~'

실리콘 부항기, 저주파 치료기, 통증파스, 통증 크림, 스트레칭 타올, 찜질팩 등등의 것들을 50니 넘으면서 소유하게 되었다. 물론 '수영'이란 운동을 하다보니 여기 저기 돌아가며 통증을 겪어 왔고, 지금은 어깨와 엘보우 통증 그리고 오늘 새로운 통증(무릎안쪽의 알수없는) 하나를 첨가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지?'

수영장에 운동하러 가서 저절로 젊은 회원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나이 들었다고 무조건 뒤로 물러나는 것 별로 좋아하는 선택은 아니었지만, 굳이 기를 쓰고 열심히 젊은 회원들을 뒤로 하고 간다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다. 그리 저절로 내려놓기를 하게된 주요 요인은 몸이 약해져서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팔다리가 아프니 저절로 양보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ㅠㅠ

운동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여기저기 파스를 붙였다. 파스가 떨어져간다. 얇고도 좋은 파스를 사러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필히 구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명품백 보다는 명품 파스를 갖고 싶다고 여기저기 아픈 현실은 말한다.

수영장은 75세의 회원님이 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사고가 나서 온통 그 불운한 이야기로 수영장이 수근거렸다. 안전에 대한 사고가 민감하지 않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다. 만일에 모를 사고를 위해 안전요원이 눈을 부릅뜨고 수영하는 회원들의 행동을 주시하며 안전에 신경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뭐 별일 있겠어' 하며 긴장하지 않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지 않을 때 사고는 일어나는 것이다.

특히 연세가 있는 회원들이 많은 수영장에서는 각별한 주의가 있어야 하는데 사고는 일어나고 말았다. 미국에 있는 수영장에서  몇 주 수영을 한적이 있다. 국제규격의 수영장이라 규모가 있었고 그래서 가드가 양방향에서 회원들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높다란 곳에 올라가 독수리의 눈으로 지켜주던 그들이 있어 든든했던 그 환경! 여기는 어떤가!

가드하는 강사가 수영하는 회원을 주시하고 있는 환경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는 오늘의 수영장 분위기를 보았다. 그야말로 만일에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반드시 행해져야 할 일이다. 한사람이라도 독수리의 눈을 뜨고 주시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회원이라도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이빙 금지'란 말이 버젓이 있어도 하루에 한번은 수영장 물 속으로 다이빙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습을 할 수 없다. 내가 저지르는 안전 불감증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강습 시간에 지도 강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해야 하는 입수동작을 날마다 연습할 수 있는 수업 커리큘럼을 고안해 내여야 한다. 수업에 들어가면 반드시 연습할 수 있다면 자의로 시도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한다. 수업내용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하니 결국은 무식하고도 위험한  행동을 실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참고로, 난 오늘 금지되어 있는 다이빙을 하지 않았다.

안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넓히고,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Wednesday, May 08, 2019

Beeing~~~

푸른 어느 날, 하루 해가 고층 아파트 옆으로 넘어간 시간이다.  아침 수영 단체수업을 들어가지 않고, 개인렛슨에서 지적받은 점을 고치기 위해 개인적인 훈련을 하였다. 홀로 수영이 끝나고 수영을 좋아하는 회원들과 킥보드 위에 올라앉아 스컬링을 하는 것과 킥보드 위에 올라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는데 나만 잘되지 않았다. ㅋㅋ 한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동작이라 그리하겠지만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그런 연약한(?)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열심히 하려고 하면 할수록 늪에 빠진 것처럼 허구적 거리고 있으니, 잘하는 친구가  힘을 빼고 아무런 일 없듯이 올라타라고 가르침을 준다. ㅋㅋ 그래서 힘을 뺏더니 요것도 저것도 아닌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요령이 있어야 하나니~~~

결국엔 혼자 시간을 내어,  킥보드를 올라타는 연습을 하면 이 또한 익힐 수 있으리란 각오를 품고 푸른 수영장 박스에서 나왔다. 수영은 즐거운 운동이지만 지금의 난 어깨가 불편하고 팔꿈치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수영이란 운동을 그만 정지하라는 제안을 받을 것 같아 어리석게 병원을 가지 못한다. 허리와 족저 근막염 때문에 시작한 운동이  새로운 통증을 동반하고 말았다. 그래도 수영을 가지 않으면 더 불행하니 오늘도 수영을 하고 온 것 아니겠는가.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는 어떤 경험을 하였는가 돌아본다. 주도적으로 시간 관리를 하였고 새로운 뭔가를 배우려고 해보았고, 타인들을 향해 부정적인 에너지를 쏟아내지 않았고, 누군가가 흔들릴 때 시간을 내어 지지를 보내 주었고,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고, 돈과 사회적 지위로 타인을 평가하는 그런 자리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잘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거려 주고싶다~~~


Tuesday, May 07, 2019

Circle of Gratitude

왜 이리 바쁘지?

남쪽에 계시는 친정 아부지를 뵈러가 기둥뿌리를 너무 뽑아온 탓인지 할일이 많다. 양파를 햇볕이 잘드는 곳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마늘쫑을 다듬어 마늘 장아찌를 만들었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  이 분주함은 오고가는 수고에 대한 그득함으로 달콤한 보상이기도 하다.

어린이날 대체휴일로 인해,  붉은 날이 이어진 이유와 오월의 날이 맑고  푸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명절같은 교통체증을 감내해야 했다. 밀린 김에 차를 틀어 군산에 들려 콩나물국 밥을 먹고 군산의 유명한 빵을  친정 아버지를 위해 줄어 서서 구입을 했다. 단음식이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집안의 트라우마가 있긴 하지만 주름진 나이엔 적당한 당분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도전적인(?) 생각이 들었었던 것 같다. 유명한 빵집답게 줄이 길었고, 계산하는 줄도 길어 한참이나  서서 인내해야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지나치는 것도 신선한 즐거움이었지 싶다. 물론 형편없는 먹거리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불쾌하기도 했다. 소떡소떡, 떡볶이, 어묵, 핫바, 핫도그, 맥반석 오징어, 등등의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은 나름 매력적이다. 하지만 맛없는 것 먹고 살찌는 것이 제일 억울한 사람으로서 휴게소의 무성의한 음식에 기분이 상하기도 하였다. 휴게소마다 분위기가 있는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들렸던 휴게소 한곳은 깨끗하고 음식도 만족스러웠다.

음식을 보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사과를 보면 엄마와의 추억, 오징어 초무침을 보면 엄마와의 추억 그렇고 보면 엄마는 음식으로 자식을 키웠으니 자식인 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말린 건어물 가게에 갔을 때 친정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자식들은 엄마의 꼬득꼬득하게 말린 서대가 다들 먹고싶다 하였다.

집으로 돌아왔다. 두 아들들이 있는 집안은 가득하다.

언젠가는 다들 떠나고 나 또한 친정 아버지의 고독을 마주 하게 될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좋고
두 아들들이 함께 살아서 좋고
남편과 밤산책을 나가서 좋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홍차를 건네는 동갑친구가 있어서 좋고
손수 담은 막장을 주는 동네 언니가 있어서 좋고
미세먼지 없는 푸른 날을 걸어 다닐 수 있어서 좋고
마늘쫑 장아찌를 성공적으로 담아서 좋고
묵은 검정콩을 튀밥을 만들어 선물해서 좋고
식구들을 위해 저녁을 만들 수 있어서 좋고

이만하면 족하지 아니한가~~~~~








Thursday, May 02, 2019

to Day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멋진 말이다 싶어 기억하고 싶다.
루틴처럼 길들여진 행동하나를 정지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보통적으로 경험하고 살 것이다. 큰일날 것처럼 어떤 작으마한 변화에도 민감한고 귀찮아하면 스트레스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이가 들면 보수적으로 일상의 리듬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수영장에 가는 시간을 두시간 앞질러 갔더니 같은 공간에 다른 사람들이 모여 색다른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고 서로 격려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싶다. 하루를 일찍 움직이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활력이 있다. 반대로 시간을 늦추어 가면 주름진 여인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형님 동생 하며 자연스런 리액션을 주고 받는 포근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또한 여유가 느껴진다. 삶에 대한 푸른 치열함 대신에,   겨울나무와 같은 내려놓음으로 단단히 올골진 얼굴속의 삶에 대한 넉넉한 여백을 마주할 수 있다.

추운 겨울엔 봄을 기다렸고, 봄엔 여름을 기다리지 않는다. ㅋㅋ 아마도 들판에 익을 곡식과 나무를 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씨앗을 심고 따뜻한 온기가 있는 봄을 기다리고 꽃피고 열매맺은 나무에 뜨거운 햇살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섭리인데 말이다.

오늘의 난 우선 빵에 커피를 마시고  설거지를 하였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그리고 좋아하는 수영을 갈 것이다. 식구들을 위해 장을 보고 그리고 시간을 내어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저녁 산책을 갈 것이다. 작품은 언제 하냐고? 늘 작품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새 시리즈를 착수하지는 못했다. 일상의 루틴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인 반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나날의 생각거리와 삶의 느낌은 내가 토해낼  작품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하고 싶지 않다.

시간은 기다리지 않고 흘러간다.

Dove Mi Trovo

'줌파 라히리'란 미국 작가가 이탈리어로 소설,내가 있는 곳을 출간했다고 한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도전하는 작가님의 글을 읽다보니 그야말로 푸른 나무를 흔드는 오월의 바람이 그냥 보이지 않는다. 신문에서 그녀의 소설  '내가 있는 곳'에서 '수영장'이란 공간에 대한 글이 있었는데 감동적이어서 바로 주문을 하였다.

'외로움'이란 단어를 그녀의 봄에서 뚜렷하게 보았지 싶다. 찬란하게 빛나는 봄날이 부담스러운 그런 날들을 경험해 본적이 있다. 공간의 이동을 함으로써 버려야 했던 것들이 주는 부담감의 무게를 견뎌 해방감으로 가기까지가 얼마나 흔들려야 했단 말인가. 새로운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려는 시도를 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주저앉아야 했단 말인가.

외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이고, 우리모두가 외롭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다.  '각자도생'의 선택을 해야했던 그 과정은 강하고 이기적인 선택들을 하게 되는 것이고 누구든지 행복할 권리가 있으므로 받아들여야 하는 여기 이곳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웃음이 통하면 다 함께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들 하는데, 웃음기 없이 독하고 사악한 얼굴을 들이대는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물론 각자의 입장을 알고보면 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감당할 수 없는데 무모한 용기를 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처럼 수영장 사우나장에서 웃음꽃 피는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다움을 맛볼 때 누군가는 침묵하고 그 소음을 견뎌야 할 것이다.  주거니 받거니 오고가는 대화를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혼자만 떠드는 그런 다소 무례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따뜻한 관계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독립적인 생활에 불편함을 주는 일인데 말이다.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그녀들과의 이야기 나누기에 취해 한참이나 그 어려운 사우나장의 열을 느끼지 못하고 오래 앉아 있었다.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