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29, 2006
Tuesday, November 28, 2006
Thursday, November 16, 2006
Negative Space---with Eric
프로젝트 안내지를 받고서 그 황당함과 당혹감을 잊을 수가 없다. 난 프로젝트가 다 마무리되어 가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나로서는 간혹 미국 학생들에게 물어본다. 넌 이해하고 있니? 그럼 그들은 영어가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피차 마찬가지 일때도 있지만, 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물어야하는지를 모르는 것이 정말 괴롭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공부의 정의이고 시작아니던가.
나름대로 프린트물 해석을 끝내고 다섯 장의 스케치를 해갔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내기에 벅찬 아이디란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면 난 '플라시틱'을 이용해서 네가티브한 공간 덩어리를 만든다고 하기에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플라스틱은 한국에서 말하는 '비닐'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가 이른 새벽에 착상해 낸 나의 아이디어는 그 재료를 가지고 하긴 어려워서 난 다시 스케치를 해야했다.
'에릭'이란 미국친구를 파트너로 만나게 되었다. 에릭은 나를 만나 특별한(?) 경험을 하는 듯했다. 왜냐면 어떻게 쉽게 영어를 사용하여 나를 이해시키고, 그리고 일을 효과적으로 진행시켜야 하는 부담감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튜이오 작업이 많은 미술전공의 학생들은 지쳐있는 시간이었다. 이 수업 저 수업에서 나오는 각 프로젝트를 해 나가는 것은 긴장감을 털어 버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어만 잘 알아먹을 수 있었다면.....윽.....
현대 미술의 한 조류인 '환경 예술' 내지는 '설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네카티브한 공간을 찾았고, 그리고 그 공간을 측정해서, 재단하고 , 그리고 글루로 부쳐서 덩어리를 만들고, 그리고 그곳에 공기를 집어 넣어 그 부피감을 더하는 일이었다.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런데 난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파편처럼 다가오는 그 아이디어의 조각 덩어리를 붙여 이해하는데 힘들었고 시간이 들었다.
누군가 해 놓은 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쉬웠을 것이다. 선배들의 작품이 있는 슬라이드 감상도 없고, 인터넷에서는 넘 유명한 작품은 교실 수업과 거리가 멀고,윽.....알고 봤더니!!!
크리티크를 하는 순간에 다른 학생들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단순한 라인의 모양을 정말 덩치크게 만들면 장땡이었다. 그 거대함에 침몰당하는 그 느낌이란...에릭과 나의 작품은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더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소파를 이용한 작품이었기에 그 덩어리감이 작았다. 그래서 단지 작다는 그 이유로 느낌이 덜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물어보았다. 큰것이 장땡이냐고? 그랬더니 그것은 아니다고 했다. 내가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처음에 내가 스케치한 대로 더 매력적인 네가티브한 공간을 찾았을 것이고, 그리고 그 네가티브한 모양도 무엇인가 메세지가 있는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역시나 몇명의 이 방면에 재능있는 친구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혼돈과 당황의 흔적없이 그들은 스케치를 하고 행동으로 옮긴 듯 했다. 경험이었을까 아니면 타고난 감각이었을까......
나이들고 영어 못하는 나를 만나 고생했을 '에릭'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말하고 싶다. 항상 느긋하고도, 결과적으로 무엇인가을 이루어내는 그에게서 한 수 배웠다. 그도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웠을까?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나로서는 간혹 미국 학생들에게 물어본다. 넌 이해하고 있니? 그럼 그들은 영어가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피차 마찬가지 일때도 있지만, 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물어야하는지를 모르는 것이 정말 괴롭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공부의 정의이고 시작아니던가.
나름대로 프린트물 해석을 끝내고 다섯 장의 스케치를 해갔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내기에 벅찬 아이디란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면 난 '플라시틱'을 이용해서 네가티브한 공간 덩어리를 만든다고 하기에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플라스틱은 한국에서 말하는 '비닐'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가 이른 새벽에 착상해 낸 나의 아이디어는 그 재료를 가지고 하긴 어려워서 난 다시 스케치를 해야했다.
'에릭'이란 미국친구를 파트너로 만나게 되었다. 에릭은 나를 만나 특별한(?) 경험을 하는 듯했다. 왜냐면 어떻게 쉽게 영어를 사용하여 나를 이해시키고, 그리고 일을 효과적으로 진행시켜야 하는 부담감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튜이오 작업이 많은 미술전공의 학생들은 지쳐있는 시간이었다. 이 수업 저 수업에서 나오는 각 프로젝트를 해 나가는 것은 긴장감을 털어 버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어만 잘 알아먹을 수 있었다면.....윽.....
현대 미술의 한 조류인 '환경 예술' 내지는 '설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네카티브한 공간을 찾았고, 그리고 그 공간을 측정해서, 재단하고 , 그리고 글루로 부쳐서 덩어리를 만들고, 그리고 그곳에 공기를 집어 넣어 그 부피감을 더하는 일이었다.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런데 난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파편처럼 다가오는 그 아이디어의 조각 덩어리를 붙여 이해하는데 힘들었고 시간이 들었다.
누군가 해 놓은 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쉬웠을 것이다. 선배들의 작품이 있는 슬라이드 감상도 없고, 인터넷에서는 넘 유명한 작품은 교실 수업과 거리가 멀고,윽.....알고 봤더니!!!
크리티크를 하는 순간에 다른 학생들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단순한 라인의 모양을 정말 덩치크게 만들면 장땡이었다. 그 거대함에 침몰당하는 그 느낌이란...에릭과 나의 작품은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더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소파를 이용한 작품이었기에 그 덩어리감이 작았다. 그래서 단지 작다는 그 이유로 느낌이 덜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물어보았다. 큰것이 장땡이냐고? 그랬더니 그것은 아니다고 했다. 내가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처음에 내가 스케치한 대로 더 매력적인 네가티브한 공간을 찾았을 것이고, 그리고 그 네가티브한 모양도 무엇인가 메세지가 있는 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역시나 몇명의 이 방면에 재능있는 친구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혼돈과 당황의 흔적없이 그들은 스케치를 하고 행동으로 옮긴 듯 했다. 경험이었을까 아니면 타고난 감각이었을까......
나이들고 영어 못하는 나를 만나 고생했을 '에릭'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말하고 싶다. 항상 느긋하고도, 결과적으로 무엇인가을 이루어내는 그에게서 한 수 배웠다. 그도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웠을까?
Wednesday, November 15, 2006
Tuesday, November 14, 2006
For Her & For Me
음~ 난 이 팜플렛을 만들고 나서 자아도취의 경지에 이르렀던 점을 자백한다. "너의 가슴을 보내라"라는 글귀의 발견은 나를 흥분시켰다. 너의 이기적이고도 편협한 머리의 돌림에서 나오는 메세지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마음을 보내자라는 중심 글귀이다. 결국 가보지 못한 길이었지만, 한땐 국문과생으로서 광고의 카피라이터를 써보는 일에 종사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난 때론 광고문에서 깊은 느낌을 받는다. 무엇인가 응축되어 있는 강한 메세지를 느껴 보는 일은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었으니깐.
무엇보다도 헬렌의 카드를 선전하기 위한 팜플렛으로서 충실하였다. 내 생각으론, 그녀의 카드는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이며 도시적이었다. 핸드메이드 카드로서 그 가치가 먼저 있는 일이었고, 그리고 그 카드가 주는 봄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에 빠져서 이 팜플렛을 만들었다. 마치 그녀의 카드를 위해 광고를 만들어주는 사람같이 말이다.
광고 핵심 타이틀에서 철학적인 내음을 풍기는 것에 맞추어 심플한 핑크색 하트를 형상화했다. 그녀의 카드에서 풍기는 그녀의 하트는 핑크색으로 느껴졌기에 전형적인 붉은 색을 쓰지 않았다. 젊은 그녀의 이미지에 맞게 핑크색 순수한 하트를 넣었고, 그리고 신실한 마음으로 부터의 표현을 손을 이용해서 나타내었고, 그것은 핸드메이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난 개인적으로 가슴에 손을 모아 신실한 표현을 나타낸 이 부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각 손가락에 중요한 형용사를 집어 넣었다. 시각적인 강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일에 더 많은 공간을 부여하기 위해 활자의 활용을 절제하였다. 그것이 어쩌면 더 정서적인 표현이라 생각되어 그렇게 결정하였다. 언젠가 광고엔 논리적인 것과 정서적인 광고가 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향수나 화장품은 환상적인 이미지로 정서적인 것이라면, 전자제품 같은 것은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를 설명이 많은 논리적인 광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카드라는 것은 결국 정서적인 것이고 그 광고 또한 정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격비교를한 실질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난 그것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고 집중하였다. 그러나 난 카드 석장에 오달러라는 것을 강조할 것인지에 대해 많이 망설였다. 왜냐면 그것은 가장 실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손가락 하나에 호기심을 일으키는 표현 하나로 절제하였다. 왜냐면 난 그녀의 호흡이 살아있는 핸드메이드 카드를 싸구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5달러에 팔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지만.
콜라지와 연이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면서 종이를 오려 붙이셔 만드는 일에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다. 종이 몇장을 덧되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참았다. 그녀의 카드는 핸드메이드였고 심플했다. 그래서 내것도 심플하고 핸드메이드 광고였다. 어차피 그녀의 카드를 위한 광고 팜플렛이 아니던가.
하지만 프리젠테시션을 떠듬떠듬 나름대로 자신감있게 한 후 나는 샘으로 부터 지적을 당했다. 종이를 덧되었으면 더욱 고급스런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난 받아들이기 힘든 주문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카드를 위한 광고 포스터 내지는 팜플렛이다. 스튜던센타 복도 적당한 자리에 붙여 놓을 생각으로 사실에 입각하여 만들었다. 한데, 프로페션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현재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쿨한 광고 팜플렛의 번쩍임과 현란함이 더욱 프로페션하단 것인가?
크리티크를 하기전 내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순간 이해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분을 상하게 했다. 물론 크리티크란 잘한 점을 부각하고 그리고 보충할 점을 보완하여 더 잘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은 기본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소하게 카드를 만들듯이 이중으로 종이를 덧붙여 고급적인 이미지를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 마스 카드를 만드는 것 처럼 입체적으로 좀 더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왜냐면 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내 팜플렛이 비싸게 보일 필요가 있는가? 내 팜플렛의 이미지가 그녀의 카드를 싸구리처럼 보이게 하였는지 묻고 싶다.
난 몰랐다. 프로패션한 광고 팜플렛은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고, 그리고 번쩍이는 비싼 종이를 사용하여 그럴듯하게 보이면 되는 것인지. 거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선배가 있었으면, 좀 물어보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달랑 프로젝트 안내 종이 하나에 의지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나이가 들어서 학교 다닌다고 해서 배려없고, 외국인이라서 영어를 못해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에 배려없다.
진작에 그런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도 월맛에 가서 번지르한 종이 하나 사서 그래픽으로 사진 집어넣고 현존하는 팜플렛을 본따서 그렇게 만들 것을...왜 난 딴 길로 갔을까! 알고 봤더니 그런 것이었다. 정성을 들인만큼 배반감이 든 프로젝트였다.
무엇보다도 헬렌의 카드를 선전하기 위한 팜플렛으로서 충실하였다. 내 생각으론, 그녀의 카드는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이며 도시적이었다. 핸드메이드 카드로서 그 가치가 먼저 있는 일이었고, 그리고 그 카드가 주는 봄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에 빠져서 이 팜플렛을 만들었다. 마치 그녀의 카드를 위해 광고를 만들어주는 사람같이 말이다.
광고 핵심 타이틀에서 철학적인 내음을 풍기는 것에 맞추어 심플한 핑크색 하트를 형상화했다. 그녀의 카드에서 풍기는 그녀의 하트는 핑크색으로 느껴졌기에 전형적인 붉은 색을 쓰지 않았다. 젊은 그녀의 이미지에 맞게 핑크색 순수한 하트를 넣었고, 그리고 신실한 마음으로 부터의 표현을 손을 이용해서 나타내었고, 그것은 핸드메이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난 개인적으로 가슴에 손을 모아 신실한 표현을 나타낸 이 부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각 손가락에 중요한 형용사를 집어 넣었다. 시각적인 강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일에 더 많은 공간을 부여하기 위해 활자의 활용을 절제하였다. 그것이 어쩌면 더 정서적인 표현이라 생각되어 그렇게 결정하였다. 언젠가 광고엔 논리적인 것과 정서적인 광고가 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향수나 화장품은 환상적인 이미지로 정서적인 것이라면, 전자제품 같은 것은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를 설명이 많은 논리적인 광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카드라는 것은 결국 정서적인 것이고 그 광고 또한 정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격비교를한 실질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난 그것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했고 집중하였다. 그러나 난 카드 석장에 오달러라는 것을 강조할 것인지에 대해 많이 망설였다. 왜냐면 그것은 가장 실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손가락 하나에 호기심을 일으키는 표현 하나로 절제하였다. 왜냐면 난 그녀의 호흡이 살아있는 핸드메이드 카드를 싸구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5달러에 팔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지만.
콜라지와 연이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면서 종이를 오려 붙이셔 만드는 일에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다. 종이 몇장을 덧되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참았다. 그녀의 카드는 핸드메이드였고 심플했다. 그래서 내것도 심플하고 핸드메이드 광고였다. 어차피 그녀의 카드를 위한 광고 팜플렛이 아니던가.
하지만 프리젠테시션을 떠듬떠듬 나름대로 자신감있게 한 후 나는 샘으로 부터 지적을 당했다. 종이를 덧되었으면 더욱 고급스런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난 받아들이기 힘든 주문이었다. 이것은 그녀의 카드를 위한 광고 포스터 내지는 팜플렛이다. 스튜던센타 복도 적당한 자리에 붙여 놓을 생각으로 사실에 입각하여 만들었다. 한데, 프로페션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현재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쿨한 광고 팜플렛의 번쩍임과 현란함이 더욱 프로페션하단 것인가?
크리티크를 하기전 내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순간 이해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분을 상하게 했다. 물론 크리티크란 잘한 점을 부각하고 그리고 보충할 점을 보완하여 더 잘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것은 기본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소하게 카드를 만들듯이 이중으로 종이를 덧붙여 고급적인 이미지를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 마스 카드를 만드는 것 처럼 입체적으로 좀 더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왜냐면 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내 팜플렛이 비싸게 보일 필요가 있는가? 내 팜플렛의 이미지가 그녀의 카드를 싸구리처럼 보이게 하였는지 묻고 싶다.
난 몰랐다. 프로패션한 광고 팜플렛은 두꺼운 종이를 사용하고, 그리고 번쩍이는 비싼 종이를 사용하여 그럴듯하게 보이면 되는 것인지. 거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선배가 있었으면, 좀 물어보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달랑 프로젝트 안내 종이 하나에 의지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사람들은 절대 모른다. 나이가 들어서 학교 다닌다고 해서 배려없고, 외국인이라서 영어를 못해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에 배려없다.
진작에 그런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도 월맛에 가서 번지르한 종이 하나 사서 그래픽으로 사진 집어넣고 현존하는 팜플렛을 본따서 그렇게 만들 것을...왜 난 딴 길로 갔을까! 알고 봤더니 그런 것이었다. 정성을 들인만큼 배반감이 든 프로젝트였다.
Monday, November 13, 2006
The Earing shows Who I am
여자는 나이가 들어가면 골이 깊어지는 주름살을 가리기 위해 나이에 비례한 금부치를 몸에 지닌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작가의 '장식론'을 읽다가 동감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는 소중한 몸에 구멍을 뚫어 물질적인 그 무엇인가를 다는 것이 노예근성의 한 표현이라고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귀걸이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시절 처음으로 귀걸이를 하였다. 생각해보면 디자인도 형편없는 질이 낮은 것들의 반짝임과 돋보임을 거부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긴 그것이 내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깐. 그 당시 귀를 뚫는 일은 지금처럼 흔한 일이 아니어서 딸랑거리는 귀걸이는 귓볼을 아프게 하였다.
젊은 날의 나는 예쁘장한 얼굴도 아니고, 피부미인도 더구나 아니고해서, 그 무엇인가가가 필요했나 보다. 그 당시 빽빽하게 찬 여드름에서 시선을 옮길 수 있는 것은 귀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난 젊은 날엔 여드름을 감추려(?) 귀걸이를 했고, 나이티가 묻어나는 작금의 나는 잔 주름에 시선이 꽂히는 것이 두려워 귀걸이를 한다. 어쩌면 깊게 파여가는 주름살에 비례해서 더욱 커진 장식물을 달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성숙함과 외면의 우아함을 빛낼 나다운 장식물을 발견하는 것이 천하고 값없는 의미없는 일이라고 나에게 말하지 말라. 왜냐면 난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니깐.
누군가는 소중한 몸에 구멍을 뚫어 물질적인 그 무엇인가를 다는 것이 노예근성의 한 표현이라고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귀걸이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시절 처음으로 귀걸이를 하였다. 생각해보면 디자인도 형편없는 질이 낮은 것들의 반짝임과 돋보임을 거부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긴 그것이 내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깐. 그 당시 귀를 뚫는 일은 지금처럼 흔한 일이 아니어서 딸랑거리는 귀걸이는 귓볼을 아프게 하였다.
젊은 날의 나는 예쁘장한 얼굴도 아니고, 피부미인도 더구나 아니고해서, 그 무엇인가가가 필요했나 보다. 그 당시 빽빽하게 찬 여드름에서 시선을 옮길 수 있는 것은 귀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난 젊은 날엔 여드름을 감추려(?) 귀걸이를 했고, 나이티가 묻어나는 작금의 나는 잔 주름에 시선이 꽂히는 것이 두려워 귀걸이를 한다. 어쩌면 깊게 파여가는 주름살에 비례해서 더욱 커진 장식물을 달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성숙함과 외면의 우아함을 빛낼 나다운 장식물을 발견하는 것이 천하고 값없는 의미없는 일이라고 나에게 말하지 말라. 왜냐면 난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니깐.
Sunday, November 12, 2006
Thursday, November 09, 2006
One hour and Half
시커먼 목탄은 다루기가 힘들다. 그리다 보면 온통 회색빛 세상이 되고 만다. 쉽게 번지고 지워지고...나름대로의 특징을 이용해야할텐디... 어쩌면 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를 해야만 내 것이 될지도...
사물들의 형태와 전체적인 구성 그리고 각 사물들이 갖고 있는 명도를 배려한다고 했는데......목탄은 연필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그 느낌은 강렬하다.
사물들의 형태와 전체적인 구성 그리고 각 사물들이 갖고 있는 명도를 배려한다고 했는데......목탄은 연필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그 느낌은 강렬하다.
Desingners...Erin & Soony
파운데이션 에이 크라스에서 솔드아웃 프로젝트 파트너가 된 '에린'이다. 오불짜리 물건을 만들어 상대 파트너와 교환하여 각기 팔아보고 그 팜플렛이나 포스터를 만드는 프로젝트인데, 만나고보니 우리는 똑 같이 카드를 만들었음을 보았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러나 우리의 카드는 다르다. 에린과 내가 다르듯이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에린은 상당히 창조적인 학생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의 독특한 비옷과 가면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생각외로 그녀의 이번 카드는 심플하여서 놀라왔다. 도시적이고 심플한 네모가 겹친 액자식 카드 컨셉과 핑크,노랑 그린으로 행복한 봄날같은 색깔의 선택 그리고 단추를 카드에 이용해서 좀더 고급적이고 재밌는 이미지를 연출하였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깔끔하게 뒷처리된 카드여서 핸드메이드가 아닌 지 알았었다. 그녀는 놀라왔다.
그러나 우리의 카드는 다르다. 에린과 내가 다르듯이 말이다. 내 생각으로는 에린은 상당히 창조적인 학생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의 독특한 비옷과 가면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생각외로 그녀의 이번 카드는 심플하여서 놀라왔다. 도시적이고 심플한 네모가 겹친 액자식 카드 컨셉과 핑크,노랑 그린으로 행복한 봄날같은 색깔의 선택 그리고 단추를 카드에 이용해서 좀더 고급적이고 재밌는 이미지를 연출하였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깔끔하게 뒷처리된 카드여서 핸드메이드가 아닌 지 알았었다. 그녀는 놀라왔다.
Wednesday, November 08, 2006
Monday, November 06, 2006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열두달의 끄트머리를 잡고 몇번쯤은 누군가에게 말하는 말이다. 벌써 이곳 카본데일의 상가들은 댕스기빙데이와 메리 크리스마스 대목을 챙기려고, 즐거운 빅세일을 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반짝임이 붉고 푸르고 하얗게 어울리고 있음을 본다. 전형적인 크리스마스의 칼라에서 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예수님이 태어난 날에 왜 산타 할아버지가 더 주인공이 되는 지는 뒤로 하고, 보통의 크리스마스가 주는 이미지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늘 우리를 흥분시키는 붉은 색, 자명하게 대조되는 그린색 그리고 순수한 흰색 그리고 고급스런 골드 그리고 별...그리고 캐롤, 양말, 눈사람...
크리스마스의 칼라들을 기본으로 하고도 식상하지 않은 카드를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단순하면서도 메세지가 있는 그런 이미지들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누군가에게서 꽃을 받은 일은 지금도 가슴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꽃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힘들엇다. 그리고 즐겁고 행복한 이미지를 연출하가위해 악보가 나와있는 종이를 활용했고, 우리의 가슴속에 작은 기적으로 빛나는 별을 붙였다.
거룩하고도 조용하게 힌눈이 나뭇가지에 내리는 날 우리의 예수님은 초라한 마굿간에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탄생이며 기적이며 날마다 우리의 가슴 속에 꽃처럼 피어야 할 예수님의 사랑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카드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올해는 내가 직접만든 카드로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난 지금 무지 행복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예수님이 태어난 날에 왜 산타 할아버지가 더 주인공이 되는 지는 뒤로 하고, 보통의 크리스마스가 주는 이미지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늘 우리를 흥분시키는 붉은 색, 자명하게 대조되는 그린색 그리고 순수한 흰색 그리고 고급스런 골드 그리고 별...그리고 캐롤, 양말, 눈사람...
크리스마스의 칼라들을 기본으로 하고도 식상하지 않은 카드를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단순하면서도 메세지가 있는 그런 이미지들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누군가에게서 꽃을 받은 일은 지금도 가슴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꽃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힘들엇다. 그리고 즐겁고 행복한 이미지를 연출하가위해 악보가 나와있는 종이를 활용했고, 우리의 가슴속에 작은 기적으로 빛나는 별을 붙였다.
거룩하고도 조용하게 힌눈이 나뭇가지에 내리는 날 우리의 예수님은 초라한 마굿간에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탄생이며 기적이며 날마다 우리의 가슴 속에 꽃처럼 피어야 할 예수님의 사랑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카드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올해는 내가 직접만든 카드로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난 지금 무지 행복하다.
How mucu it will be----Sell Out(F.A)
독서.논술 지도를 하는 것이, 아니 중학교에 나가 국어교사를 하는 것이 직접 무엇인가를 만들어 누군가의 구매충동을 일으키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5불짜리 무엇인가를 만들어 파트너에게 주고, 또 파트너의 물건을 온갖 광고를 동원해서 팔아보는 일이다. 그 과정속에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관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의 필요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해서 강렬한 유혹으로 도전하는 일일 것이다. 감동 시키는 것을 넘어 졸도를 시키라는 것인데...난 무기가 없나보다.
할 수 없이 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쿠키도 못굽고 그렇다고 김치를 만들어 팔 수도 없고...무엇을 팔지? 크리스마스 시즌이 생각났다. 막상 카드를 사고자 하면, 비싸고 내 취향의 디자인을 만나는 것도 힘들고 해서 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초등학교시절 이후로 한번도 만들어 보지 않았기에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우선 월맛과 몰에 가서 현 경향과 가격조사를 했고, 그리고 내 나름의 심플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그것에 맞는 재료들을 찾고...
주말을 이용해서 20장의 카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이것을 시장에 내놓으려고 하니 두려움이 앞선다. 나의 남편이 선주문을 하였다...아주 비싼가격으로 사기로 구두계약을 맺은셈이다.
문제는 내 파트너이다. 내 파트너가 내것을 잘 팔아야 할텐디...또 난 어떤 누구의 어떤 작품을 만나게될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팔아야 할까?
이번 프로젝트는 5불짜리 무엇인가를 만들어 파트너에게 주고, 또 파트너의 물건을 온갖 광고를 동원해서 팔아보는 일이다. 그 과정속에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관계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의 필요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해서 강렬한 유혹으로 도전하는 일일 것이다. 감동 시키는 것을 넘어 졸도를 시키라는 것인데...난 무기가 없나보다.
할 수 없이 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쿠키도 못굽고 그렇다고 김치를 만들어 팔 수도 없고...무엇을 팔지? 크리스마스 시즌이 생각났다. 막상 카드를 사고자 하면, 비싸고 내 취향의 디자인을 만나는 것도 힘들고 해서 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초등학교시절 이후로 한번도 만들어 보지 않았기에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우선 월맛과 몰에 가서 현 경향과 가격조사를 했고, 그리고 내 나름의 심플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그것에 맞는 재료들을 찾고...
주말을 이용해서 20장의 카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이것을 시장에 내놓으려고 하니 두려움이 앞선다. 나의 남편이 선주문을 하였다...아주 비싼가격으로 사기로 구두계약을 맺은셈이다.
문제는 내 파트너이다. 내 파트너가 내것을 잘 팔아야 할텐디...또 난 어떤 누구의 어떤 작품을 만나게될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팔아야 할까?
Sunday, November 05, 2006
White, Gray and Black
어두움이 없다면 찬란한 밝음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너와 나의 관계속에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우리다울 수 있는 것...
그림자가 없는 그림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버리지 못하고 사나보다.
Thursday, November 02, 2006
Wednesday, November 01, 2006
Autumn
숙녀에서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내 이름 석자 "서은순"을 누구의 아내와 엄마라는 칭호로, 혹은 아줌마란 단어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나마 교회에서 내이름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바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난 직장생활의 경험이 없었다. 국어교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난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결혼을 하였다. 훗날 현실적으로 전문 직업여성이 되지 못한 것에 데한 후회로 남게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난 먼저 결혼을 선택하였다.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한셈인데, 난 그때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스물 세살의 나이였다.
다행히(?)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결혼을 빨리 하는 추세여서 그 결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였다. 내 인생의 선물로서 두 아들들을 서른살 이전에 받았고, 그리고 나름대로 충실하였다. 아이들이 자라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나는 나의 자기개발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사회라는 곳에 발을 내딛기엔 나의 지식은 짧았고 노후했다. 그래서 난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서울 연세대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독서지도자 프로그램을 수료했고, 그리고 글쓰기와 논술 프로그램을 찾아 참여하였다. 난 나를 재교육시킬 수 있는 그 자체가 좋았다. 그러다보니, 기회가 찾아왔다. 항상 준비하는 자만이 스쳐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난 증거할 수 있다.
중학교에 나가 기간제 교사를 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초등학교 특기적성교육에 관심이 있었다. 이력서를 인천교육청에 내고 돌아오던 그 가슴뜀을 잊을 수가 없다.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없이 전화가 왔다. 그것은 큰 기쁨이었다.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수하기 위해선 교육에 관련된 과목들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은 날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에 그 정의를 알게 하였고, 그리고 그것이 초등학교 수업현장에 임했을 때 나를 덜 당황스럽게 하였었다.
확언하건데, 난 잘나가던 특기적성교사였다. 오라는 학교는 많은데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절대 잘나서가 아니고, 나는 노력을 했었고 그리고 뿌린만큼 보답을 받았었던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은 나를 절대 사랑하신다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특기정성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난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대화기법과 레크레이션 프로그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나를 프로답게 교육시켰고, 내 교실현장에서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늘 깨우치고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빠르게 변화하는 교실현장에 나가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난 이 시점에서 마이너리티로서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받았던 인상을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떤 교사들은 참으로 열정적이고 개방적이고 친절하다면, 어떤 교사들은 권위적이고, 편협적이고, 배타적이었다. 특기적성교육에 대한 몰이해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의 숨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건드리고, 그들이 느끼는 무엇인가를 글로 표현하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고, 나의 의미였다.
운이 좋게 난 중학교 기간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교육청에 접수를 하였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고 사실이다.(ㅎㅎㅎ)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자유로운 특기적성교사와는 다르게 하루종일 학교에 붙어 있어야했다.....ㅎㅎㅎ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바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난 직장생활의 경험이 없었다. 국어교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난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결혼을 하였다. 훗날 현실적으로 전문 직업여성이 되지 못한 것에 데한 후회로 남게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난 먼저 결혼을 선택하였다.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한셈인데, 난 그때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스물 세살의 나이였다.
다행히(?)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결혼을 빨리 하는 추세여서 그 결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였다. 내 인생의 선물로서 두 아들들을 서른살 이전에 받았고, 그리고 나름대로 충실하였다. 아이들이 자라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나는 나의 자기개발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사회라는 곳에 발을 내딛기엔 나의 지식은 짧았고 노후했다. 그래서 난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서울 연세대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독서지도자 프로그램을 수료했고, 그리고 글쓰기와 논술 프로그램을 찾아 참여하였다. 난 나를 재교육시킬 수 있는 그 자체가 좋았다. 그러다보니, 기회가 찾아왔다. 항상 준비하는 자만이 스쳐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난 증거할 수 있다.
중학교에 나가 기간제 교사를 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초등학교 특기적성교육에 관심이 있었다. 이력서를 인천교육청에 내고 돌아오던 그 가슴뜀을 잊을 수가 없다.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없이 전화가 왔다. 그것은 큰 기쁨이었다.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수하기 위해선 교육에 관련된 과목들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은 날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에 그 정의를 알게 하였고, 그리고 그것이 초등학교 수업현장에 임했을 때 나를 덜 당황스럽게 하였었다.
확언하건데, 난 잘나가던 특기적성교사였다. 오라는 학교는 많은데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절대 잘나서가 아니고, 나는 노력을 했었고 그리고 뿌린만큼 보답을 받았었던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은 나를 절대 사랑하신다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특기정성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난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대화기법과 레크레이션 프로그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나를 프로답게 교육시켰고, 내 교실현장에서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늘 깨우치고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빠르게 변화하는 교실현장에 나가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난 이 시점에서 마이너리티로서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받았던 인상을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떤 교사들은 참으로 열정적이고 개방적이고 친절하다면, 어떤 교사들은 권위적이고, 편협적이고, 배타적이었다. 특기적성교육에 대한 몰이해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의 숨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건드리고, 그들이 느끼는 무엇인가를 글로 표현하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고, 나의 의미였다.
운이 좋게 난 중학교 기간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교육청에 접수를 하였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고 사실이다.(ㅎㅎㅎ)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자유로운 특기적성교사와는 다르게 하루종일 학교에 붙어 있어야했다.....ㅎㅎㅎ
Summer
나의 여름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돌이켜보면, 내가 안고 있던 문제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의식있는 국어 선생님께선 교과서에 나와있는 '청춘예찬'을 외우게 했었다. 분단끼리 일어나 특정 부분을 외우는 일이었는데, 참으로 힘들고 의미없는 일처럼 다가 왔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나의 청춘이 빗겨 가는 어느 날 우연히 책을 읽다가 '청춘'이란 단어를 보다가 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그 샘의 의도를 알 것 같았고, 그 작가의 피 끓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숙녀로서 얌전하게 원피스를 입고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바람에 날리는 이상적인 여대생이 아니었다. 나의 얼굴엔 청춘의 심볼이라는 꽃이 만발하고, 대학전공은 나에게 꿈을 주지 못한 시절이었다. 꿈이 없는 시간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난 의식서클을 뛸 만큼 지적이지도 않았고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합창단과 테니스 서클 또한 내게 기쁨이 되질 못했고, 그리고 나는 교회에 대해 순수하지 못했었다. 정신적인 안식처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던 숱한 시간들을 어떻게 지나온 것일까?
작은 오빠의 시련은 나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난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더 이상 웃음이 없는 밥상에 둘러 앉아 아침을 먹었던 것, 한숨과 탄식으로 자식들 걱정을 하던 나의 엄마 아빠의 모습과 병마에 허물어져가는 젊은 나의 오빠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영화나 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오빠의 시련을 함께 슬기롭고도 지혜롭게 풀어나가기엔 현실은 혹독하고 힘겨웠다. 우리 모두를 상처주고 파멸시킬만큼.
밤이면 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잠들지 못한 시간들을 하얗게 책을 읽었다. 검은 활자들 속에 숨어 있는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좋은 친구였으며 큰 위안이 되었다. 현실도피적인 성격이 짙은 시간들이었지만, 난 그 때 책을 친구보다 좋아했다.
그리고 난 사랑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불확실하고도 불안한 나날들부터 건강한 현실로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청춘' 그것은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뛰고 눈물나는 단어이다.
Spring
내게도 봄날은 있었고, 봄날은 갔다.
배만 부르면 잘놀고, 한번 울면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면서 의사소통을 확실히 하며 목청을 튀었다는 유아시절의 순수함 그리고 튼튼하게 시골 돌담길 사이 사이를 누비고 다녔던 유년시절의 풋풋함, 큰소리로 웃어졌겼던 말괄량이 소녀시절이 시간 사이 사이로 빠져나간 장면들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난 달은 음력으로 정월이다. 나의 엄마는 정월생들이 기가 세다며 봄의 정기를 듬뿍 받은 나의 봄같은 에너지를 옛날 여인답게 걱정아닌 걱정을 하곤 했었다. 음력으로 나의 생일달은 봄에 해당한다. 양력으로 하자면 3,4,5월이 봄의 달이라면, 음력은 농경기의 시점에서 보자면, 정월부터가 봄에 해된다고 한다. 씨를 잉태하고 기다리는 봄날에 난 아들만 둘 있었던 서씨 집안에 아버지를 닮은 씩씩한 딸로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 난 엄마의 품보다는 아버지의 넒은 품과 텁텁한 아버지의 냄새를 좋아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고 거기다가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는 뚱뚱한 '뚱순이'를 먹거리가 좋은 시골 친지친척들은 나를 당신들 집에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시골 큰엄마는 딸삼아 나를 데리고 있었다. 일곱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까지 난 이년남짓 시골 큰댁에서 귀염움을 떨며 지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무를 떼어 밥을 짓던 시절이었다. 아담한 초가집 마당에서 재미있는 놀이에 흠뻑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고, 돌담의 이름모를 꽃들을 꺽으며 소꼽장난을 하였다. 시골친구들과 나무 땔감을 찾으러 산을 탓으며(?), 해질녁 밥짓는 굴뚝의 연기를 좋아하던 순진한 소녀였다. 지금껏 나는 이 시절의 그리움을 안고 산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나는 도시로 와야했다. 각인되어 있는 도시의 을씨년스러움은 회색빛이었다.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학교로 간 처음날의 그 낯설음... 부잣집딸의 레이스 달린 흰양말과 흰우유병을 부러워하던 가난한 도시의 소녀였다. 내가 감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부를 때 도시의 친구들은 피아노를 쳤던 모양이다. 그 이질감...난 시골의 친구들이 그리워 손꼽아 방학을 기다리고, 시골을 등지고 떠나올 때 아쉬워 눈물짓던 순수한 소녀였다.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시골친구들은 사라졌다. 다들 도시로 떠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초가집도, 초롱불도, 돌담도, 모든 것이 변해갔다.
중학교 시절 나는 더이상 예전처럼 시골을 가지 않게 되었다. 문학소녀라기 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을 좋아하고, 깔깔대고 웃는 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도시 소녀였다. 캔디라는 만화를 보기 위해 텔레비젼 앞에 매달려 있던 나의 사춘기는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꿈꾸며 자라고 있었다...여드름이 얼굴에 솟구치고,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게 보이지 않았다.
사춘기는 작은 오빠의 시련과 함께 무엇인가 부족하고,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으로 사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시점이라고 해야할까.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 그것은 달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웃고 다녔다.
배만 부르면 잘놀고, 한번 울면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면서 의사소통을 확실히 하며 목청을 튀었다는 유아시절의 순수함 그리고 튼튼하게 시골 돌담길 사이 사이를 누비고 다녔던 유년시절의 풋풋함, 큰소리로 웃어졌겼던 말괄량이 소녀시절이 시간 사이 사이로 빠져나간 장면들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난 달은 음력으로 정월이다. 나의 엄마는 정월생들이 기가 세다며 봄의 정기를 듬뿍 받은 나의 봄같은 에너지를 옛날 여인답게 걱정아닌 걱정을 하곤 했었다. 음력으로 나의 생일달은 봄에 해당한다. 양력으로 하자면 3,4,5월이 봄의 달이라면, 음력은 농경기의 시점에서 보자면, 정월부터가 봄에 해된다고 한다. 씨를 잉태하고 기다리는 봄날에 난 아들만 둘 있었던 서씨 집안에 아버지를 닮은 씩씩한 딸로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 난 엄마의 품보다는 아버지의 넒은 품과 텁텁한 아버지의 냄새를 좋아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고 거기다가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는 뚱뚱한 '뚱순이'를 먹거리가 좋은 시골 친지친척들은 나를 당신들 집에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시골 큰엄마는 딸삼아 나를 데리고 있었다. 일곱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까지 난 이년남짓 시골 큰댁에서 귀염움을 떨며 지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무를 떼어 밥을 짓던 시절이었다. 아담한 초가집 마당에서 재미있는 놀이에 흠뻑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고, 돌담의 이름모를 꽃들을 꺽으며 소꼽장난을 하였다. 시골친구들과 나무 땔감을 찾으러 산을 탓으며(?), 해질녁 밥짓는 굴뚝의 연기를 좋아하던 순진한 소녀였다. 지금껏 나는 이 시절의 그리움을 안고 산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나는 도시로 와야했다. 각인되어 있는 도시의 을씨년스러움은 회색빛이었다.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학교로 간 처음날의 그 낯설음... 부잣집딸의 레이스 달린 흰양말과 흰우유병을 부러워하던 가난한 도시의 소녀였다. 내가 감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부를 때 도시의 친구들은 피아노를 쳤던 모양이다. 그 이질감...난 시골의 친구들이 그리워 손꼽아 방학을 기다리고, 시골을 등지고 떠나올 때 아쉬워 눈물짓던 순수한 소녀였다.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시골친구들은 사라졌다. 다들 도시로 떠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초가집도, 초롱불도, 돌담도, 모든 것이 변해갔다.
중학교 시절 나는 더이상 예전처럼 시골을 가지 않게 되었다. 문학소녀라기 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을 좋아하고, 깔깔대고 웃는 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도시 소녀였다. 캔디라는 만화를 보기 위해 텔레비젼 앞에 매달려 있던 나의 사춘기는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꿈꾸며 자라고 있었다...여드름이 얼굴에 솟구치고,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게 보이지 않았다.
사춘기는 작은 오빠의 시련과 함께 무엇인가 부족하고,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으로 사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시점이라고 해야할까.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 그것은 달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웃고 다녔다.
Who am I
나 자신에 대한 콜라지를 하는 동안 지나온 시간들을 뒤돌아 보게 되었고, 그리고 현재의 시간들이 엮어낼 미래의 시간들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씨앗들이 성숙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들은 오늘이 없으면 열릴 수 없는 결과물이란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하는 시간이었다.
좀 더 간단하고 강렬하게 이미지를 만들지 못한 아쉬움도 있긴 하지만, 어린시절의 순수함, 소녀시절의 명랑함, 젊은 날의 방황, 그리고 새로운 인생의 출발의 정거장이 되었던 결혼, 열정적인 직장생활, 그리고 큰 전환점이 될 미국생활 그리고 그 후의 미래의 시간...이런 과정속에 기억하고 싶지 않는 어떤 부분이 떠올라 눈물을 흘려야했고, 그리고 현재의 생활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치게도 된 뜻깊은 시도였다고 본다.
미래의 시간을 이미지화 할 때 두려움이 있었다. 과거의 시간은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고 그리고 현재의 시간은 구체화 하기 쉽지만 미래의 시간은 누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난 소망했다. 인생을 뜨겁게 살다간 한 인간이 되기를. 삶이란 뜨거운 사랑을 가슴속에 품고 쭉 살아가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