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01, 2006

Spring

내게도 봄날은 있었고, 봄날은 갔다.

배만 부르면 잘놀고, 한번 울면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면서 의사소통을 확실히 하며 목청을 튀었다는 유아시절의 순수함 그리고 튼튼하게 시골 돌담길 사이 사이를 누비고 다녔던 유년시절의 풋풋함, 큰소리로 웃어졌겼던 말괄량이 소녀시절이 시간 사이 사이로 빠져나간 장면들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난 달은 음력으로 정월이다. 나의 엄마는 정월생들이 기가 세다며 봄의 정기를 듬뿍 받은 나의 봄같은 에너지를 옛날 여인답게 걱정아닌 걱정을 하곤 했었다. 음력으로 나의 생일달은 봄에 해당한다. 양력으로 하자면 3,4,5월이 봄의 달이라면, 음력은 농경기의 시점에서 보자면, 정월부터가 봄에 해된다고 한다. 씨를 잉태하고 기다리는 봄날에 난 아들만 둘 있었던 서씨 집안에 아버지를 닮은 씩씩한 딸로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 난 엄마의 품보다는 아버지의 넒은 품과 텁텁한 아버지의 냄새를 좋아했다.

성격이 온순하고 고분고분하고 거기다가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는 뚱뚱한 '뚱순이'를 먹거리가 좋은 시골 친지친척들은 나를 당신들 집에 데리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시골 큰엄마는 딸삼아 나를 데리고 있었다. 일곱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까지 난 이년남짓 시골 큰댁에서 귀염움을 떨며 지냈다고 한다. 그 당시 나무를 떼어 밥을 짓던 시절이었다. 아담한 초가집 마당에서 재미있는 놀이에 흠뻑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고, 돌담의 이름모를 꽃들을 꺽으며 소꼽장난을 하였다. 시골친구들과 나무 땔감을 찾으러 산을 탓으며(?), 해질녁 밥짓는 굴뚝의 연기를 좋아하던 순진한 소녀였다. 지금껏 나는 이 시절의 그리움을 안고 산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나는 도시로 와야했다. 각인되어 있는 도시의 을씨년스러움은 회색빛이었다.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학교로 간 처음날의 그 낯설음... 부잣집딸의 레이스 달린 흰양말과 흰우유병을 부러워하던 가난한 도시의 소녀였다. 내가 감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부를 때 도시의 친구들은 피아노를 쳤던 모양이다. 그 이질감...난 시골의 친구들이 그리워 손꼽아 방학을 기다리고, 시골을 등지고 떠나올 때 아쉬워 눈물짓던 순수한 소녀였다.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시골친구들은 사라졌다. 다들 도시로 떠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초가집도, 초롱불도, 돌담도, 모든 것이 변해갔다.

중학교 시절 나는 더이상 예전처럼 시골을 가지 않게 되었다. 문학소녀라기 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을 좋아하고, 깔깔대고 웃는 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도시 소녀였다. 캔디라는 만화를 보기 위해 텔레비젼 앞에 매달려 있던 나의 사춘기는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꿈꾸며 자라고 있었다...여드름이 얼굴에 솟구치고,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게 보이지 않았다.

사춘기는 작은 오빠의 시련과 함께 무엇인가 부족하고, 허전하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으로 사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시점이라고 해야할까.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 그것은 달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웃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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