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01, 2006

Autumn

숙녀에서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내 이름 석자 "서은순"을 누구의 아내와 엄마라는 칭호로, 혹은 아줌마란 단어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나마 교회에서 내이름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바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난 직장생활의 경험이 없었다. 국어교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난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결혼을 하였다. 훗날 현실적으로 전문 직업여성이 되지 못한 것에 데한 후회로 남게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난 먼저 결혼을 선택하였다.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한셈인데, 난 그때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스물 세살의 나이였다.

다행히(?)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결혼을 빨리 하는 추세여서 그 결정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였다. 내 인생의 선물로서 두 아들들을 서른살 이전에 받았고, 그리고 나름대로 충실하였다. 아이들이 자라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나는 나의 자기개발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사회라는 곳에 발을 내딛기엔 나의 지식은 짧았고 노후했다. 그래서 난 재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서울 연세대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독서지도자 프로그램을 수료했고, 그리고 글쓰기와 논술 프로그램을 찾아 참여하였다. 난 나를 재교육시킬 수 있는 그 자체가 좋았다. 그러다보니, 기회가 찾아왔다. 항상 준비하는 자만이 스쳐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난 증거할 수 있다.

중학교에 나가 기간제 교사를 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초등학교 특기적성교육에 관심이 있었다. 이력서를 인천교육청에 내고 돌아오던 그 가슴뜀을 잊을 수가 없다.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없이 전화가 왔다. 그것은 큰 기쁨이었다.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수하기 위해선 교육에 관련된 과목들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은 날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에 그 정의를 알게 하였고, 그리고 그것이 초등학교 수업현장에 임했을 때 나를 덜 당황스럽게 하였었다.

확언하건데, 난 잘나가던 특기적성교사였다. 오라는 학교는 많은데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절대 잘나서가 아니고, 나는 노력을 했었고 그리고 뿌린만큼 보답을 받았었던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은 나를 절대 사랑하신다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특기정성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난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대화기법과 레크레이션 프로그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나를 프로답게 교육시켰고, 내 교실현장에서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늘 깨우치고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빠르게 변화하는 교실현장에 나가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난 이 시점에서 마이너리티로서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받았던 인상을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떤 교사들은 참으로 열정적이고 개방적이고 친절하다면, 어떤 교사들은 권위적이고, 편협적이고, 배타적이었다. 특기적성교육에 대한 몰이해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그들의 숨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건드리고, 그들이 느끼는 무엇인가를 글로 표현하게 만드는 일은 참으로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고, 나의 의미였다.

운이 좋게 난 중학교 기간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교육청에 접수를 하였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고 사실이다.(ㅎㅎㅎ)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다음에 이야기 하기로 하고.....자유로운 특기적성교사와는 다르게 하루종일 학교에 붙어 있어야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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