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커피숍이 있는 건물 앞 도로에서 힘없는 낙엽들을 몰아내느라, 웽웽거리는 바람돌이 돌아가는 소리가 소란스럽다. 웽웽거리는 바람에 놀란 힘없는 낙엽들이 공중 부양을 하여 도로변 구석진 곳으로 쏠려 모아진다. 어라, 바람돌이를 쥐고 있는 사람은 낙엽들을 책임지고 쓸어 담지 않는다.
저 도로 구석진 곳에 모아진 낙엽은 누가 치우는 것인가? 가로수는 국가의 것이고 그 가로수 부산물인 낙엽은 국가가 책임질 것인가. 도로변엔 비가 오면 물이 빠져 나가야 하는 장치가 되어있는데 낙엽들은 그 낮은 곳으로 비처럼 모이고 있는 것이다. 저걸 어째?
출근 길 버스 정거장 차디찬 벤치에 앉아서, 도로 건너편 흐린 가을 날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봄, 여름 동안 바라 보았던 가로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벚나무는 이른 봄 낭만적인 꽃도 서둘러 주더니 가을이 되어도 실망스럽지 않게 이파리도 이쁘게 물이 든다. 벌써 가장 높이 멀리 뻗어나간 가장자리에서 낙엽을 떨쳐 내버린 것인가. 앙상하고 여린 가지들이 회색빛 하늘에 수를 놓은 것 같다.
아, 겨울을 앞둔 벚나무의 혁신은 '가장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인가 하여 핸드폰을 꺼내어 검색을 해보았다. '나무는 낙엽을 어떤 순서로 진행하는가?' 대부분의 나무들은 가장 오래된 나뭇잎부터 떨구어 낸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절대적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바라보는 벚나무는 가장 높은 가장자리에서 겨울을 위한 혁신을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수분을 가장 자리 끝까지 올려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겨울을 보내기 위해 땅속 뿌리들에게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으로 짐작해 본다.
수북이 내려앉은 낙엽들이 낭만적이긴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뭇잎에 미끄러질까 현실적인 염려가 들어서고 만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 것인가. 먼저 온 사람이 먼저 타는, 버스에 대한 예절이 없는 사람이 의외로 있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무례한 청년을 아침부터 교육을 하기 뭐해서 오늘 아침도 입을 꾹 다물고 만다. '그려, 먼저 올라 타시게나...' 기본적인 '예'를 챙기기 힘들 정도로 힘든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려 걷고 있자니, 어여쁜 청보랏빛 나팔꽃들이 보이지 않고 아주 작은 분홍색 나팔꽃만 보인다. 아침에는 피고 낮엔 꽃을 오므린다고 했는데, 새벽녘에 내린 이슬이 추웠던 모양이다. 나팔꽃이 꽃 크기를 확 줄이고, 피고 오므리는 꽃들이 함께 하는 것 아닌가. 겨울이 오고 있음이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나팔꽃은 크기를 줄인 탓으로 아주 귀여운 나팔꽃이 되어 버렸다. '그만 멈추어야 할텐데...' 나팔꽃의 '생존본능'이란 것이 때를 알아 '미리' 멈추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변화를 추구하고 추구하다 겨울이 오면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