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20, 2022

Not Into You

 어젯밤 심심해서 티비 리모콘을 만지작 거리다가 나이든 여인들의 함께 사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한때는 스타였던 나이든 여인들이 함께 살면서 사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보고 있으면 왠지 위태스럽다. 방속 작가의 치밀한 각본과 연륜있는 연출과  여러가지 고려해서 편집을 하고 내어 놓는 방송이겠지만 끝까지 보지 못하고 채널을 돌리게 된다. 물론 나이가 훨씬 많으신 언니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이 더 주름지고 늘어진 기분과 함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중독성이 있다. 

도전적인 여자가 불편하다는 남자의 말에 평소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며 자기생각이 뚜렷한 여배우가 삐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헐! 여리여리 순하고 가날픈 여인에 대한 낭만을 품고 사는 남자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강하고 도전적인 여인은 적으로 느껴져 감당하기 불편하다는 이야기다. ㅋㅋ '적'이라고?

그런 남자 만나면 안된다고 댓글 날리고 싶었다.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자기 생각 뚜렷하고 잘하는 것 잘하고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하는 여자에게 연약한 척 해주라는 것인가? 부성애를 자극하는 매력이 없음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냥 그 남자가 그녀에게 아닌 것이다라고 크게 말해주고 싶다.

참으로 이상하다. 나 또한 엊그제 심은 여리여리한 사랑초에 자꾸만 눈을 마주친다.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있는 화초들은 그냥 지나가고 바람불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랑초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ㅋ 

일찌기 중학교 소녀시절, 유난히도 남자에게 인기가 있었던 친구가 생각이 난다. 여리여리하고 얌전하고 조심스럽게 걷던 그녀에게 동네 남자애들은 수학여행 선물을 갖다 주었다. ㅋㅋ 그리고 그 뒷애기를 건네 들은 튼튼한 나는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그녀는 소녀같은 판타지를 풋풋한 소년들에 갖게 하였던 것이다. 

그녀도 이제는 환갑이 멀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튼튼한 나도 흐물거린다. 제법 선선해진 초가을 바람에 사랑초가 흔들거린다. 바람을 타는 사랑초는 그것대로 멋있다. 그냥 멋진 일이다. 

사랑초가 흔들거리는 아침은 어제 구입한 열무와 얼갈이 김치를 담기 좋은 날이기도 하다. 후딱 김치를 담았다. 맑은 햇살과 푸른 하늘의 구름아래에서 갖게된 이 뿌듯함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꾸민 것이 아닌 진짜 내것. 일부러 누구에게 잘보이려고 하지 않는 요즈음의 시간도 그런대로 괜찮다. 


Plug Out

 전기가 몇시간 동안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빨간색 들어간 안내문이 오랫동안 붙어 있었지 싶다. 노후한 아파트 관리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 있는 모양이다. 공기처럼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았나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갑작스럽게 전기가 나가면 민감한 전자제품들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플러그를 빼달라한다. 전기가 없음으로 인해 일상의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병원에 가달라한다. 전기가 없는 몇시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연하게 전기와 함께 살아간다. 아득하게(?) 먼 옛날 초가집 초롱불 시절엔 전기 없이 살았었다. 산과 들로 뛰어놀고 밤에 잠잤던 시골 큰아버지댁에서 머물던 어린시절은 전기가 없었다. 유년의 기억이 시작되던 시골시대는 전기가 없었다. 방학을 맞이해 시골에 들리면 점차 새마을 운동으로 개량지붕을 한 시골집들은 검은 줄을 타고 들어오는 전기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농촌의 밤은 이른 저녁을 먹었던 것 같고 일찍 아침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노란 전구불이 언젠가부터 창백한 형광등으로 바뀌고 그 시골은 사람들이 떠나고 이상하게 비어갔던 것 같다. 

전기가 갑자기 나갔던 여름이 몇번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성냥과 초를 구비하고 언젠가부터 손전등을 준비했으니까. 우물속에 김치를 넣어서 보관해서 건져내어 먹었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푸른색 패턴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아이스 박스속의 김치! 얼음장사가 골목을 오갔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냉장고가 들어왔다.  이제는 웬만하면 김치 냉장고, 큰 냉장고, 거기에 냉동고까지 구비하고 살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전기가 몇시간 동안 나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냉동실에 음식을 없애고, 쉽게 상하는 음식을 당분간 구입을 하지 않고  비상상황을 맞이해야 하겠다. 

어라, 엘리베이터도 작동을 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약속이 있어 외출하고 돌아오니 엘리베이터가 깜깜하다. 끙끙거리며 짐을 들고 운동이다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계단을 올라오니 숨이 막힌다. 전기가 집나간  집은 참으로 조용하다는 것이다.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늘 있어왔던 것이 없으면 불편하다. 뭔가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늦게 깨닫는 것이 삶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전기는 예고한 것 보다 훨씬 빨리 집으로 찾아 들어왔다. 냉장고가 켜지고 인터넷이 되고 안정감이 든다.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되었지 싶다. 



Monday, September 19, 2022

The Used

 '사랑초'라고 불리는 식물을 중고거래를 통해 공간안에 들여다 놓았다. 한번은 키워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던 식물이다. 검은 자주빛과 보라색이 섞인 오묘한 색과 어리어리한 어린 줄기에 나비를 연상시키는 이파리가 인상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허락해야 할 나이다. 그렇지만 자꾸 베란다창가에 햇살 비추는 비어있는 공간이 아깝다.

중고거래를 하다보면 이웃님들의 물건을 들여다보며 삶을 배우기도 한다. 타인의 공간에 있다 나오는 물건들은 가끔 놀랍다. 살아가는 모습이 각기 다르기에 나오는 물건은 흐름이 있다. 그릇 욕심이 많아 그릇이 넘쳐나는 사람, 화초를 좋아해 여기저기 식물이 공간을 점령하는 사람, 여기저기서 선물을 받아 세트로 그릇이 나오는 사람, 취미로 모았던 물건들을 드디어 정리하는 사람, 고급진 장식물을 내놓는 사람, 나눔을 받아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내놓는 사람, 돈이 급해 이것저것 내놓는 사람, 금을 내놓는 사람, 등등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물건을 내놓는다.

필요없는 물건을 내다팔고 필요한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중거거래가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물건을 팔기만 하던 때도 있었고 구입만 하던 때도 있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적당한 조율을 하는 것 같아 내심 다행이기도 하다. 뭐든 과한 것은 부족함 보다 못하니 말이다. 

길에 오가다 동네 꽃집에서 '사랑초'를 찾아보지만 잘 보이질 않는다. 우연히 중고거래에 나와있는 저렴한 사랑초를 발견하고 마침 비어있는 화분에 심어주기로 하였다. 단단하게 컴팩트 하게 키워보리란 각오로 흙에 마사토를 많이 섞어주었다. 남쪽으로 나있는 창가에서 햇빛을 받으면 줄기가 튼튼해지고 색이 더 선명하게 찬란하리라. 

콩나물 보다 더 여리한 줄기에 깜짝 놀란다.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를 새화분에 옯겨 심은다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고 준비하고 있었던 화분으로 집을 새로 만들어 주었다. 몇줄기가 끓겨 나가는 희생이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였다. 

다음날 아침기운에 사랑초는 누윈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다! 그래도 일어나지 못한 줄기들을 제거했다. 견뎌내는 것들만 살아가는 것이다. 넘 참혹한가.

자꾸만 눈이 간다. 여릿한 생김새와 달리 알뿌리 식물이다. 화분에 옮길 때 보니 콩알만한 알로 뿌리를 만들고 있었다. 보라색 꽃도 들어 올릴 것이지만 이파리로만도 충분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다양한 사랑초들이 등장을 한다. 나에게로 온 사랑초는 이파리가 큰 자주보라빛 사랑초다. 미국집에 잡초처럼 올라왔던 작은 크로바에 노란꽃을 기억한다. 화단정리 할 때면 뽑을까 말까 망설였던 그 꽃이 사랑초였다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중고거래 알림단어들을 청소삼아 제거하니 세상이 조용하다. 그래도 부르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니 구매하고 싶다는 이웃님의 반가운 소리이다. 필요한 이웃님이 물건을 가져가 감사하다는 인삿말을 풍성하게 보내신다. 이웃님의 말씀을 읽고나서 깨달은 바 있어 구석진 곳에 내팽겨진 물건을 찾아내 수선집에 맡기고 돌아왔다. 새로운 가치를 일깨워주신 이웃님이 고맙다. 


 

Wednesday, September 14, 2022

The Rotten Peaches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썩은 복숭아를 면전에 들이대고 싶다. 대형 슈퍼 앞에서 좌판을 꾸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를 연민같은 것이 생긴다.  노점에서 물건을 파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없기에 뒤적뒤적 현금을 찾아 지불하고 검은 비닐 봉투에 담아오는 품목들은 그날 구매계획이 없었던 충동구매이다. 뭔가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든다. 아파트 건널목 아저씨 감자는 싸고 품질도 좋았다. 시장입구 거리에 있었던 할머니 도라지는 싱싱하고 맛있었다. 큰 마트 앞에서 복숭아를 파는 중년 아줌마를 보았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복숭아를 팔고 계신다.

집까지의 거리를 생각할 때 그냥 바나나 한송이면 족했다. 원하는 브랜드의 복숭아도 아니었다. 하지만 복숭아 아줌마는 바나나 값을 받지 않을 터이니 복숭아를 데려 가라고 한다. 포장상자를 제거하고 검은 비닐 봉지에 담긴 그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한 복숭아들은 마침내 내 어깨에 매달리고 말았다. 아직 딱딱하고 맛있는 복숭아라고 하잖아. 바나나와 복숭아의 무게탓으로 어깨가 아파온다. 독감예방 주사 맞은 팔은 쉬어야 한다. 예약된 곳의 방문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뭔가 알뜰하고 뿌듯한 마음은 서둘러 복숭아를 씻을 때 물컹하게 좌절했다.제일 단단했던 복숭아를 면전에 들이댔던 그 쉬운 상술에 속은 것이다. 명절에 판매 되어야 해서 일찍 출하되었던 복숭아는 겉만 멀쩡하고 속은 삭고 있었던 것이다. 순진하고 무식한 내 자신을 탓해야 한다. 아니야, 맛있을거야! 다른 것은 괜찮겠지. 인정하기 힘들었다. 하루밤을 지낸 복숭아는 오래 묵은 티를 감추지 못하고 거뭇거뭇 사람 손을 탄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아!

미국에서 살 때, 오월이면 정말 맛있는 로컬 복숭아를 실컷 먹었었다. 오,육달러 하면 한바구니 대략 10개 정도 되었을 것 같다. 이파리가 달려있기도 한 황도 복숭아의 달달한 즙을 흘리며 먹고 살았기에 이곳 한국에 돌아와 거의 십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쉽게 복숭아를 구입하지 못한다. 여름끝에 나오는 한국의 복숭아는 너무 비싸다. 수박도 비싸다. 저렴한 것은 참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칼을 들고 시도한다. 도저히 먹을 수 없다. 밍밍하고도 썩음한 이 복숭아를 어찌 한단 말인가. 쨈을 만들기로 한다. 껍질을 벗기고 자이레톨 설탕을 부으려는 순간 마침내 버릴 결심을 한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넣기전 쫓아가 항의할까 하는 어느정도 논리적인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대형마트라면 영수증을 갖고가 어떤 항의라도 하겠지만 길거리 산전수전 다겪었을 것 같은 중년 아줌마에게 어찌 도전할 것인가.

그려, 먹고 내보냈다고 생각하자. 자신도 물건 받아 파는 것이라 몰랐다 하면 뭐라 할것인가. 

명절이 끝나 판매되고 있는 과일에 대해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서둘러 출하된 과일들이 유통되고 결국은 나같은 무지한 소비자가 당하는 것이다. 길거리 노점상이라도 동일한 장소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상도덕을 순진하게 믿었던 내탓이라며 그냥 썩어가는 감정을 버리기로 한다. 썩은 복숭아라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정이 있는 것이라며 이해하고 절대 그곳에 가서 과일을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의 페인팅을 보고 복숭아빛 파레트를 가졌다고 했던 미대 여교수님이 생각난다. 세잔느의 파레트와 흡사하다며 풍부한 그레인톤속에서 빛나는 생동감있고 맛있는 색감을 칭찬했드랬지. 그리고 한 여교수님도 생각난다. 자신의 세잔느의 그림을 무지막지 싫어한다며 머디한 그레이톤이 깔려있는 유화 그림의 깊이를 몰라라 했던 프린트 베이스 쨍한 칼라감을 가졌던 그분은 지금도 거리를 뛰어 다니고 있을까. 크리티크를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며 하는 것은 아닐진데 그땐 그분에게 인정받지 못한 느낌은 혐오감이었지 싶다.

진정한 크리티크는 무엇일까. 언제나 비판적인 크리티크는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상처 안은 채 고민은 내가 했으니 말이다. 

먹는 것에 진심인 나는 맛없게 삭아버린 복숭아를 쉽게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한동안은 찾지 않겠지만 살다보면 잊혀질 것이다. 더 조심스런 선택을 하게 되겠지싶다.



Tuesday, September 13, 2022

Cutting

 '가치 치기'라 부르기엔 손끝에 짓눌린 콜레우스 작은 이파리는 연약했다. 지역 중고 사이트에서 만난 이웃님의 선물로 받은 '콜레우스'를 수경으로 재배할까 한참 망설이는 중에 어느새 콜레우스는 유리컵안에서  하얀 수염같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너무 여리하게 자라나는 것이 불편해서 흙속에 뿌리를 든든하게 넣어 주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길다랗게 웃자란 식물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와중에 너무 여린 두줄기가 끊어지는 참사를 겪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야. 물이 잘빠지게 난화분에서 나온 난석을 밑에 깔고 세척된 마사토를 섞은 배양토로 집을 만들어 주는 정성을 들였다. 물과 햇빛을 먹으면 멀겋게 빛바랜 이파리가 활기있게 짱짱하리라는 어렵지 않은 비젼을 보았다. 난 할 수 있어. 전혀 귀찮지 않아. 나의 의미가 될 것들은 귀찮지가 않은 모양이다.

소문대로 남쪽으로 난 창가에서 신선한 바람과 맑은 햇살을 먹으니 줄기가 튼튼해지고 이파리가 커지고 붉은 핑크가 진하게 퍼진다. 신기하다. 웃고 있지만 빛을 못보고 구석에 박혀있던 스마일 티팟에 서있는 콜레우스의 붉은 빛은 이상하게 치열하다. 왜 그렇지? 티팟에 표정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웃고 있는 머리위로 붉은 빛 핑크가 자라니 시각적 언어는 웃프다.

뿌리내린 스마일 티팟이 작으니 웃자라게 해서는 안된다. 분양해서 돈을 벌 의지도 별로 없다. 다만 갖고 있으니 이웃들의 콜레우스에 더 눈이 가며 물욕이 생긴다.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 콜레우스라는 사실을 알고야 말았다. 동네 부동산 가게 앞에서 거칠게 자라나고 있는 튼튼한  남의 콜레우스 바라보고 걷다가 지나가던 행인과 부딪혀 넘어질 뻔 하지 않았는가. 욕심이 많다.

두근거리는 욕심은 시간이 지나며 현실에 주어진 주제파악을 하면서 진정되었난 보다. 그래, 컴팩트하게 고급진 형태의 나만의 콜레우스를 갖기로 하자고. 족함을 알고 행복하기로 결심한다. 

그동안 축적된 경험이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앎의 확신으로 돌아와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다. 그야말로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물을 주어야 하는 때를 알아 과습을 방지 하는 것과 함께 언제 가지치기를 해서 격조있는 틀을 만들어 줄 그 때를 아는 것이 내게로 온 콜레우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인것이다.  

'꼬집기'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성장점에 나와있는 어린 잎들을 꼬집어서 뜯어내는 혹독한(?) 짓을 해야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손끝에 꺽이는 어린 잎들의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시간이 지나 잎들이 새로운 가지를 만들이 나에게로 오고 있다. 

만족하다!

이에 앞서 먼저 내게로 온 '까라솔'이란 다육이는 집에 오자마자 날고생을 한 불쌍한 식물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장점을 꼬집었더니 시들시들 병든 모습으로 한참이나 있으며 시각적으로 예민한  나를 힘들게 한다. 안볼란다. 치열하게 살아나겠지.  다행히 한 가지가  성공을 해서 어린 새끼들을 만들어 놓았다. 차라리 그냥 꼬집기를 하지않고 냅두고 볼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그럴수도 있지. 어쩔 수 없다. 

햇빛을 향해 넘어가는 까라솔 티팟을 방향을 바꾸어 준다. 어쩔 수 없이 햇살로 쏠리는 것을 어찌 막을 것인가. 세상사가 그렇다. 난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새로움을 항상 추구한다면 늙어도 늙지 않은 것이다. 오늘은 무엇을 버려야 할까. 붉은 빛 신발 하나를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 


Thursday, September 08, 2022

under the Sun

 밤하늘 아래 걷던 길을 아침에 걷기로 결심을 했다. 아침풍경을 기대하는 한편 어두움에 가려져 있었을 모습이 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 두렵기도 하였다. 등산을 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사람이 앞에서 걷는다. 덩그렇게 우직하게 서있는 산이 저만큼 있다는 것을 잊어 버렸나 보다. 더운 날에 낑낑거리며까지 올라가고 싶지 않아서 멀어졌던 산이 생각났다. 

아파트 입구엔 상가가 있기 마련이고 편의점이 있는 곳에 쓰레기가 모인다. 쭈그리고 앉아 담배 연기를 품어대던 사람들은 밤을 좋아하나 보다. 아침이라 그런것인지 그들이 던진 담배꽁초만 보인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아들 덕에 강아지에 대한 애정 깊은 마음이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강아지의 이름을 불러 그 강아지가 눈을 마주치며 애교부리는 모습에 그만 넘어가 이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강아지들에게 구애를 청하는 눈길을 보내고 만다. 

강아지의 엄마 아빠라 칭하는 사람들이 참 이상했었다. 그런데 이제 할미라며 말을 붙이며 강아지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오고 만다. 이래저래 웃을 일 있으면 좋은 것이다. 왜 작은 개들은 으르렁 거리며 짖어대는 것일까. 작은 개들도 나름이겠지만 소란스럽게 반응하는 소리에 놀라 쳐다보면 등치가 작은 개들이다. ㅋㅋ 뭐지? 열등감일까 아니면 생존하려는 울부짖음일까.

공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밤에 비해 적다. 자외선 치수가 높은 날씨를 고려한다면 든든한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거나 모자와 양산으로 내리쬐는 죄없는 태양을 가려야 한다. 수백년 살 것처럼 노화를 촉진하는 자외선을 막아야 한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척 하고 자외선 차단효과는 떨어지지만 바람이 송송 통하는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와서 다행이었다. 

아침에 보는 나팔꽃은 아름답다. 음지에 있으면 푸른 빛, 양지에 있으면 보라 빛에 가까운 푸른 빛, 그리고 아주 작은 붉은 색 나팔꿏이 잡초속에서 아침합창을 한다. 얼마나 귀엽고 멋진 형태인가.

일부분이 콘크리트 길이지만 넉넉하게 흙으로 이루어진 길이 있음에 감사한다. 자갈이 고개를 쳐든 거친 길이지만 등산화를 신으면 족하다. 콘크리트 담장을 타고 담쟁이가 올라가고 있다. 날마다 조금씩 저 높은 곳으로 향해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최선을 다한 초록빛이 지쳐가는 시간이다.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나기 시작한 것 같다. 

아침산책이 에너지를 충전해 주었던지 슈퍼에 들러 장을 보기로 했다. 올해 한번도 담지 않았던 '열무김치'를 담아 보기로 한다. 손이 컸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한단만 사기로 했다. 쪽파가 들어가야 맛있다는 사장님의 충언을 따라 쪽파도 한단 샀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듯이 열무를 다듬고 씻고 절이고 담으면 된다. 후다닥 담아 맛을 보니 슈퍼 사장님 말씀과 같이 열무가 여리고 부들부들하다. 열무김치 담은 자신을 쓰담쓰담 칭찬해 본다. 

가을날이 참으로 좋다. 이렇게 좋은 것들은 짧다. 이러다가 오리털 잠바입고 추운 날을 견디겠지 싶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이웃님이 좋은 글을 붙여 놓는다.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는 

해야 할 것은 돈 모으고 살빼기

하고 있는 것은 살 모으고 돈빼기 

ㅋㅋ 사는 것이 그렇다. 


Tuesday, September 06, 2022

The Yellow Peach

이른 새벽에 일어나지 않고 다섯시가 조금 넘어 잠이 깬 것은 좋은 징조이다. 흘깃 훔쳐본 시간을 보고 건강한 제자리로 찾아 돌아가는 안도감이 스쳤다. 핸드폰과 돋보기를 가져와 이리저리 둘러보다 '수면첼로'를 켜고 달콤한 아침잠을 청해 보았으나 추석 명절을 앞둔 수요일은 바쁜 날이라고 몸은 긴장을 한다. 핸드폰 사운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피아노 수면 유도음악은 띵띵거려 거슬린다. 결국 지친 고막으로 인해 핸드폰을 끄고서야 마침내 잠이 힘들게 찾아오곤 했다. 우연히 첼로 사운드에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것을 감지했다. 

첼로임에도 불구하고 온 신경이 곤두선다. 벌떡 일어나 아침을 일찍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시간대가 바뀐 도시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태풍이 지나간 아침은 맑고 깨끗하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노점상이 있는 거리로 향하기로 한다. 장바구니를 끌고 나온 나이 많으신 할머니들이 바쁘다. 무슨 대파 가격이? 무슨 상추 가격이? 무슨 배추 가격이? 놀래다 못해 사지 않기로 한다. 차라리 대형 마트에서 세일하던 무우가 실실하고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시장이라고 해서 다 싼 것이 아니다. 시장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대파와 빨간 파프리카를 구입해서 시장을 본격적으로 둘러 보기로 하였다. 

모든 것이 비싸다!

조금 먹고 조금 내놓기로 한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냉동실에서 동태전감을 내놓았다. 명절이면 으레 먹어야 할 것 같은 동태전은 귀찮지만 기름맛인지 동태살맛인지 맛있다. 제사 상차림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발표가 있었다고 뉴스에서 난리다. 왜 이제 와서야 그런 발표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조상님께 바치려고 동태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 따근한 뉴스를  멀겋게 듣고 그냥 하던대로 동태전을 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할 수 있으니까.

기름맛을 보아서 그런지 얼큰한 것이 필요하다. 흰두부를 넣은 청국장이 땡긴다. 그래 오늘 밤은 청국장을 해봐야겠어. 점심을 동태전으로 기름지게 먹고나니 낮잠이 서둘러 찾아온다. 

몇자 그적거리고 다시 동네 큰마트에 나가볼 생각이다. 뉴스에 의하면 추석전날에 장을 보면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기엔 넘 불안하다. 마트 앞 길거리에서 팔고 있었던 황도 복숭아를 사야한다. 큰아들이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놓으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다. 


Monday, September 05, 2022

After Storm

 비바람이 지나간 초가을 하늘은 축복같은 파란색 하늘에 흰구름이 가득이다. 미세먼지와 초미세 먼지까지 태풍이 몰고 갔다. 모든 것이 샤워를 한듯 깨끗하니 기분이 덩달아 산뜻하고 맑아진다. 

눈부시게 좋은 날 옷정리를 서둘러 하였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옷들이다. 태풍속에서 살아남은 옷들이기도 하다. 온 가족이 내놓은 옷들은 산더미로 쌓였지 싶다. '뭣이 중한가'를 먼저 생각하며 기본적인 옷들만 남기고 옷에 깃들인 추억을 떠나 보냈다. 지금은 살이 붙어 더이상 입을 수 없었을 옷들이다. 나이와 환경에 맞는 옷을 선택하는 일은 머리가 살짝 아픈 일이기도 하다. 나름 의미가 있어서 선택하고 구입했던 옷들이 아닌가. 그 결단은 삶속에 마주했던 태풍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멋쟁이'란 말은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옷은 어린시절의 콤플렉스로 진한 욕망이 깔려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잘나가던 친구의 하얀 레이스 양말과 타이트하게 달라붙던 하얀 스타킹에 비교되었던 너무 커서 주름지며 늘어졌던 나의 하늘색(?)스타킹이 잊혀지지 않는다. ㅠㅠ

어쩌면 어린시절 결핍이 옷에 대한 넘치는 소비를 나름 하게하지 않았나 싶다. 유학시절 마음껏 입어보고 골랐던 경험에서 어느정도 옷에 대한 한풀이를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이상 옷에 대한 욕망이 자라지 않음에 감사하기도 하다. '몸이 명풍이어야 한다'. 건강한 몸을 보호하고 빛낼 옷이면 된다는 생각이 지금은 지배적이다. 품격을 잃지 않고 나다운 그런 옷차림을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옷장의 공간이 차오르니 마음이 불안하다. 뭔가 꽉찬 느낌은 좋지 않다. 

코앞에 수영장이 있다. 마트를 다녀오다가 횡단보도에서 멋진 수영장을 지켜보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안가는 것일까 못가는 것일까. 일단 아직 코로나 시국이다. 이제 살이 늘어 맞는 수영복이 없다. 수영장에 가지 않아도 일상의 생활이 잘 굴러가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날이 어두워지면 근처 공원을 걷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좋다. 잘관리 되지 않아 돌부리가 많은 위험한 길이지만 등산화를 신고 걸으면 걸을만 하다. 가끔은 검푸른 넓은 밤 하늘에 있는 별도 몇개 셀 수 있다. 절대 드넓은 하늘을 보지 못할 것이라 미리 좌절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흙이 있는 축구장과 야구장이 있어 맘만 먹으면 뛸 수도 있고 맨발로 걸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수영장에 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집앞에 수영장이 있어도 가지 않는 나는 변한 것 같기도 하다. 잊어버린 것일까. 몇년 동안 수영을 하면서 즐겼던 그 기쁨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루라도 수영을 안하면 안될 것 같았던 그 강한 욕망은 사라진 것이다. 2년하고도 몇개월만에.

그렇게 삶은 이어지는 모양이다.

Sunday, September 04, 2022

Monday

 '월요일' 이렇게 시작하며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블로그에 뭔가라도 남겼던 그 자신을 만나야 한다. 아무말이나 그적거리며 나를 찾기로 한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태풍이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무지막지한 태풍이 오기전에 서둘러 아침을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지난 밤은 잠을 설쳤다. 아니, 날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제대로 못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는 탓으로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편이다. 평소엔 운동도 할겸 편한 신발을 신고 나다니지만 태풍으로 내리는 빗줄기가 심상치 않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버스를 탔다. 오가는 길에 동네 사람들의 쓰레기를 많이 목격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발생되는 쓰레기를 환경미화적으로 처리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몇년 전에 일본을 여행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은 쓰레기 처리였던 것 같다.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보기가 어려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무척이나 일본의 마을이 깨끗하고 단정해서 좋았던 것에 비하면 이곳은 어떤가. 쓰레기의 당당함이라고 할까. 부끄러움이 없다. 학교앞 쓰레기, 빌라앞 쓰레기, 슈퍼앞 쓰레기,...길거리에 쓰레기가 나와 있으면 수거하기엔 편한 점도 있을 것 같긴 하다. 

생활 쓰레기를 아무곳에나 투척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경고 녹음기가 사람이 지나칠 때면 딱딱한 법적인 말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곳엔 양심없이 버린 쓰레기가 모여든다. 아마 이쯤되면 시스템의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 비를 맞고 있는 쓰레기는 더욱 처참했지 싶다. 

걷다보면 포도넝쿨이 있는 한옥집을 지나가곤 한다. 결혼전까지 살았던 한옥집 풍경과 닮아있다. 그래서 항상 눈길이 간다. 화장실 위에 포도나무는 왜 심었던 것일까? 재래식 화장실을 올라탄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려있는 풍경이 빈티지이다! 집앞 주차를 막으려고 내어놓은 화분속에 그 그립던 채송화가 빨갛에 피어있었다. 할머니가 생각나는 채송화!

쓰레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꽃들과 마주한다. 꽃을 향해 눈길이 돌아가는 것은 나이듦의 표시라고 한다. 인정한다. 난 나이가 많다! 이제 염색도 일부러 하지 않게 되어 어떤 자연스런 자유스러움을 즐긴다. 나이 들어서 좋은 것 중에 하나일 것 같은 즐거움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가끔은 두렵기는 하지만 나만 좋으면 된다싶다. 어쩌면 이것이 나이듦의 한 예시일 것이다.

쿠폰을 찍어주는 정육점앞에는 명절준비를 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모여있다. 고기맛도 좋고 가격도 착한 집일 것이라 예상하며 지나간다. 야구르트 아줌마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다. 나무그늘 아래에 항상 있었던 야구르트 아줌마가 자리에 없다. 태풍 때문이기도 하고 서둘러 길을 재촉한 나의 부지런함 때문일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오갈때 차들이 두렵다. 이제 법이 개정되어 보행자가 우선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습관처럼 차를 운전한다. 슬그머니 지나치고 때론 무식하게 위협적이다. 손을 들어 저항해본다. 성격탓도 있을터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쭈볏거린다. 어쩌면 그런 주저함이 사고를 더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횡단보도에선 차가 일시정지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사를 했나보다. 덩치가 있는 가구들이 비를 맞고 서있는 풍경을 지나 '콜레우스'란 식물이 있는 인테리어 가게앞을 지나친다. 깻잎처럼 생긴 식물인데 이파리가 꽃보다 아름답다. 꽃말이 '절망스러운 사랑'이라서 실망스럽긴 하지만 자꾸 눈이 간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알게된 이웃님이 거래선물로 콜레우스를 선물로 주셨다. 참 신기하다. 평소에 관심이 있어서 바라보곤 했던 식물을 얼굴 몇번 본 사람으로부터 선물로 받는다는 것이 작은 기적이다. 

이름을 검색해 보고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공부를 했다. 평소 아끼던 스마일 티팟 도자기를 꺼내 구멍을 만들어 콜레우스 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스마일 티팟이 웃고 그리고 콜레우스가 핑크빛으로 물들며 튼실해 지고 있다. 행복해도 되는 이유다!

사거리 횡단보도는 지루하다. 그래서 현수막이 많이 걸려있는 것일까. 다가오는 명절을 축복하는 지역 정치가의 현수막, 원어민 영어를 가르친다는 현수막, 최저가 아파트 분양 현수막, 도시재생 사업을 한다는 구청 현수막 심심해서 읽다보니 신호등 불이 초록으로 바뀐다.

아파트 방음벽을 올라 타려는 푸른색 나팔꽃을 만났다. 다 오르지 못하고 찬바람을 맞아 사라질 것 같다. 작은 나팔꽃을 보면서 씨 뿌리고 키웠던 내 정원의 모닝 글로리를 생각했다. 기세등등 지붕위로 마구 솟구치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싹둑 잘라냈던 잡초같은 모닝 글로리가 아직도 마음속에서 푸른 나팔을 불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