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Artist, David Hockney
수영장에서 만나는 이중적이며 혹은 예의적인 아니 교양있는 에피소드로 호키니처럼 수영장 시리즈를 만들 수 있을까? 아침신문에서 다시 만난 그의 그림은 생존 작가로서 그의 작품, 예술가의 초상이 최고가 낙찰가를 갱신(1019억원)했다고 한다. 수영하는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친밀감과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호키니가 고민했을 동성애적인 이슈와 작가로서 바라봤을 환경에 대한 풍경은 태양이 늘 떠오르는 것처럼 담담하고 평면적이며 일반적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되어버린 것처럼, 수영장에서 겪는 에피소드는 날것의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물이 주는 부드러움이 사람들의 뾰족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면면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바라보기와 해석하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때로는 각자의 몸안에 물들이 흔들리며 제각기 생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튀지 않고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원만하니 교양있게 기분좋게 수영을 하기 위해선 보고도 못본 척, 듣고도 못들은 척, 뒷말을 하고도 안한 척 척척척을 하며 견디며 적응해 나가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호키니도 평영에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수영 네가지 영법(접영, 자유형, 평영, 배영)중에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평영이기에 수업전후로 나머지 공부를 하며 나름 전투중이다. 그러기에 그림속의 평영 발동작에 웃음이 나오고 만다. 유난히 평영다리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푸른 수영장에 가는 것이 오히려 즐겁고 지루할 틈이 없었던 것 지나고보니 감사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부족하고 서툴러서 이리저리 견디며 배웠던 것 그 또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제대로 잘 주름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타인에 대한 자비와 관용이 생겨날 수 있다면 얼마나 크나큰 깨우침을 얻는단 것인가.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한참이나 최근에 일어난 일을 돌아 보았다. 쉽게 자신의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쉽게 부정적인 생각과 타협하지 않고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고 살고 있는지, 구석진 곳에 모여있는 쓰레기 같은 것들로 오염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가 겨울나무처럼 버릴 것은 버리고 안으로 밑으로 단단이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호키니처럼 수영장 시리즈를 만들 수 있을까? 물은 100도가 되기전엔 절대 끓지 않는다고 한다. 푸른 박스 속에서 겪는 이야기가 무르 익으면 나만의 새 시리즈가 나올 수 있을까 자문해본다. 푸른 박스를 여행하고 있는 작가임을 잊지 않기로 한다. 무엇이 두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