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25, 2025

단도리

 며칠째 너무 이른 시간에 잠이 깨는 현상이 습관처럼 굳어지고 있나 보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할 수 없이 잠에서 깬 김에 스마트 폰을 붙잡고 유익한(?) 정보를 들으며 자체교육에 들어가며 내심 잠들기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정신이 말똥거린다. 난감하다~~~

전전반측 뒤척이다, 할 수 없이 주어진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적극적으로 미처 끝내지 못한 블로그 글쓰기를 수정하고, 캘린더에 깨알처럼 적혀있는 할 일들을 챙겨보고, 미루었던 리서치도 하다보니 아침 기상 알림벨이 울린다.

수면 부족으로 가구 모서리에 유난히도 여기적기 몸을 부딪힌다. '아, 이래서 나이가 들면 '낙상'이란 것도 하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과 골다공증이 심했더라면 뼈들이 부숴질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통증과 함께 느껴진다.  얼른, 불처럼 번지는 한밤중의 각성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라 바람이 휘청거린다. 건조한 바람을 타고 번지는 불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산불에 대한 안전문자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실수로 인한 작은 '불씨 하나'가 건조한 강풍을 타고 '산불'이 되어 불타오르고 있는 뉴스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불을 촉진하는(발화성) 요소가 많은 상록수인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대부분인 산은 활엽수가 분포된 산보다 쉽게 불타오른다고 한다. 동네 근처 산은 대부분이 활엽수라 불이나면 바스락거리며 쉽게 탈 것 같다며 걱정했는데.

예사롭지 않게 휘몰아치는 봄바람 때문에 공원 걷기를 정지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단도리가 되지 않은 종이 박스들이 길거리에 나뒹구는 모습은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이 스산했다. 미리 미리 준비를 하고 '야무지게' 단도리를 하면 안되는 것인가. 길거리에 나뒹구는 박스들을 주워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놓고 오는데도,  책임지고 단도리를 해야 할 사람들은 별 주의도 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먹고 살려고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데 그깟 종이박스가 차가 다니는 도로에 좀 날아간 것이 별일이야. 그럴 수 있지. 지나가던 내가 주워주면 되는 것이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가끔은 '잘 살고 있는 것일까?'하고 자문를 하다보면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시시하고 그냥저냥한 시간이 쌓여 만든 초라한(?) 모습이 보인다.  '자족'하며 그날그날 기꺼이 작정하고 행복하고 싶은데 말이다. 

몸과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워질 땐 '그냥' 동네 공원을 걷고 볼 일이다. 온 몸을 움직여 제대로 걷기를 하다보면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되고 부글거렸던 생각의 거품이 걷히고, '무엇이 중헌가'하며  내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산 것이지?'

뒤늦은 '후회감'으로 온 몸이 반응을 하며 조바심을 낸다. 주제 파악을 '부정적'으로 하면 생각이 유연성 없이 굳어지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뒤따라오는 무력감으로 인해  '도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마음밭에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너도 반드시 죽는다)란 말뚝을 결정적으로 박으며,  일시적으로 부글거리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가라 앉히고 보는 것이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며, 주위를 돌아보고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소중한 자신에게 '직무유기' 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삶에 집중하고, 무엇이 중헌가 생각하며,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알아채야 한다. 각성하여 여기저기 정보를 검색하고 문의하고 진보하여 다음 단계의 문을 열어 젖히자니 막연하게 부풀려진 두려움이 걷히고 구체적인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방향을 잡았으면 무리하지 않게 천천히 나의 속도로 가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Life is a Matter of Direction)란 말은 예나 지금이나 옳다. 하지만 방향감이 없는 것 또한 삶의 한 모습이니 그리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나름 '업그레이드' 하기 좋은 적당한 때가 지금이며, 늦었다고 생각되는 지금이 제일 빠른 순간!

Sunday, March 23, 2025

알딸딸~

 긴겨울이 데리고 온 봄날은 삼월인데도 느닷없는 오월 중순의 햇살을 내린다. 멀리 바라보는 산은 미세먼지로 불안하게 자욱하지만 나무들이 있는 산으로 향한다. 꽃이 아직 피지 않은 걸 알면서도, 푸른 기운이 솟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계곡에 물이 흐르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양지 바른 곳에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그늘 없는 나무'들은 다르다. 찬란한 햇빛의 사랑을 많이 받은 진달래가 꽃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름도 모르는 나무들이 여기저기 넘어져있다. 비탈길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겨울을 지나면서 쓰러진 것이다. 이 또한 자연의 모습인 것을. 

제철을 맞은 '봄도다리'를 구입하러 어시장으로 향했다. 쫄깃쫄깃한 봄도다리 회는 정지했던 술을 부른다.  봄날에 들떠 술 한잔을 밀어 넣은 세상은 기분 좋게 알딸딸하다. 소중한 몸에 대한' 죄책감'은 몸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콜라비'를 구하러 재래시장에 가기 딱 좋은 날이지 않는가.  

따스한 봄날과 더해진 술 기운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탓인지, 먹어서는 안될 얼굴 큰 호떡을 먹고 말았다. 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알딸딸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봄길에서 분홍 진달래와 하얀 목련을 귀하게 만났다. 아, 봄이다!


Saturday, March 22, 2025

나의 날개

  때로는 '날개'가 되는, '나이로 입는다'는 옷을 잘 챙겨입고 '자신감'을 챙겨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옷이 '자신감'을 주는것이냐고 묻는다면 난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장소와 시간 그리고 경우에 맞게 깨끗하고 단정하게, '나다운' 편안한 옷을 챙겨입고 나가면 '여유'라는 것이 생기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끔은 상대방의 뾰족한 태도와  자신의 못난 모습에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옷의 순기능을 체함하기도 한다.

겉단장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는 슬슬 봄처럼 살아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면에는 어쩌면 어린시절의 레이스 양말에 대한 '결핍'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편안한(?) 옷을 입고 어두운 무기력의 시간을 뒹굴뒹굴 지냈던 시간이 내게 있었다. 옷장의 옷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옷에 대한 아무런 욕망이 생기지 않았던 겨울의 시간을 통과한 나는 옷들을 챙겨보며 '나의 날개'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패션은 '자신감'인데,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는 나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기꺼이' 슬기로운 노력이란 것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추진력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다. 먼저 새옷을 구입하기 앞서, 새로 출근할 환경에 어울리는 실용적이면서도 자신을 자신답게(?)하고 품위와 인격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옷(사람의 특징, 직업, 성격)을 옷장을 뒤적이며 찾아보는 것은 어리석은 충동구매를 방지할 수 있기도 하다.

매너 전문 강사 '재클린 위트모어'는 '자신을 최고로 보이게 하는 것은 허영심이 아니다. 대신 자기 개선에 관한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패션은 트랜드를 따르는 것이고 스타일은 옷을 입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나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어야 하는데......먼저 소중한 몸을 건강한 '명품'으로 만들고 볼 일이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태도와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말을 따라 난 지금 '옷'으로 날개를 달고 있는 중이다. 


Wednesday, March 19, 2025

걸어서 출근

 '걸어서 출근' 하고 싶은 바램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지 않고 두 발로 걸어서 출근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물론 결단을 내리기 위해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는 셈법을 해야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이기로 한다. '단기 계약'으로 인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적응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지만, 이 또한 나의 삶을 정체되지 않고 더 성숙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어버리기로 한다. 

'축하합니다~~~~~'란 문자를 마침내 받은 것이다. 여기저기 지원서를 제출하며 간절히 바라던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이다. 미리 나이탓을 하며 포기하지 않고,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회를 만들어낸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어찌 망설임과 흔들림이 없었겠는가. 그렇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다!

교육현장에 나가기 전, 무엇보다도 '인내심'을 품은 '기다림'을 장착하고 본다. '스턴버그'(심리학자)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에서 완전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를 열정친밀, 그리고 헌신을 언급했다고 한다. 열정을 품은 마음에 '인내심'을 장착하고, 친밀감은 '기다림'을 장착하고, 헌신엔 '열정'을 장착하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로 다짐해 본다. 



Tuesday, March 18, 2025

난 누구?

 '면담'을 시작하면서 자기 소개를 간략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하며  짧게 대답을 하면서 내 마음이 붉어졌다.  전공과 경력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한 단어, '열정'이란 말로 적절하게 표현한 것일까. 더 나은 자신을 위해서 '일'이 필요한 것이고, 개인적인 경험과 능력을 고려할 때, 어떤 도움과 기여를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노라 분명하게 말해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Monday, March 17, 2025

적재적소

 올해 들어 처음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다. 작년의 처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초긴장감 대신에 뭔가 불안한(?) 싱숭거리는 느낌은 있다. 3월 중순을 지나고 있는 시간이 무색하게 하얗게 젖은 눈이 내리고 있는 아침이다. 새벽 배송으로 날아온 짭짤이 토마토, 노란 참외, 콜라비를 샐러드에 넣어 먹을 수 있게 준비를 하느라 몸을 바삐 움직이다보니, 뒤숭생숭한 마음이 좀 가라 앉아 마침내 맑은 물이 찰랑거린다.

두꺼운 겨울 옷을 챙겨입고 동네장에 가서 신선한 먹거리를 사가지고 와야 한다. 지난번 '돌미나리'의 향긋한 맛을 잊지 못한 것이다.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 말씀대로, '끓인 물에 넣었다 얼른 빼내는' 데치기 요령을 준수했더니 신기하게 질기지 않았다. 물이 끓으면 대담하게 가스를 끄고 미나리를 신속하게 넣었다 빼야하는 '초'시간을 지켜야했던 것이다. 겨울을 견디고 나온 부들부들하고 향긋한 미나리는 오래전 내 정원의 끄트머리에서 키웠던 미나리가 푸릇푸릇했던 봄의 풍경으로 데리고 간다.  

 며칠만 꽃샘 추위를 지나고 나면, 노란 산수유가 작은 꽃들을 내밀 것이고, 진달래, 목련, 개나리가 찾아 올 것이다.  급속하게 달라지는 기후변화로, 짧은 봄에 이어 '긴 여름'이 11월까지 이어질거라고 한다. 어서, 창문을 활짝 열고 '봄맞이 집정리'를 하며 불필요한 것을 버려야 하는데, 봄은 정말 천천히 온다.  더 간소한 삶 속에서 불필요한 물건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는 시간이다. 창문을 열어젖힐 그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적재적소의 '정리'라는 것을 해보는 것으로. 허기진 소비생활 자제하고 각성하자고! 

The Brutalist

영화 '더 부르탈리스트(The Brutalist)'를 이해하기 위해서 '부르탈리즘'의 건축 개념을 알아보니,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 1950년~1970년)을 가지고 있고, 기능성과 효율성을 극대화 시킨 건축양식으로 '장식적인' 외장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건축물'이란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하고, 최소화된 창문 노출, 절제된 장식, 단순한 기하학적인 건물 구조의 특징은 '삭막한'이란 단어를 충분히 떠오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미국 유학시절, 영어 언어 연수를 받던 건물이 바로 부르탈리즘적 건물이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글리'란 말을 사용하며 거친 콘크리트 건물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말하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 군데 군데 적절한 장소에 푸른 화분과 이쁜 꽃이라도 놓여있지 않았더라면, 바로 근처에 사슴이 노니는 숲이 있지 않았더라면 등등의 만약의 경우들을 생각해 본다.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영화에서 나온 대사처럼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게 만드는 기능도 갖고 있는 듯.

 영화의 주인공,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유대계 헝가리인 천재 건축가로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에서 살아 남아 겨우 낯선 미국땅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각박한 생활고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어찌저찌하여 자신을 알아본 부유한 자산가를 만나 자신의 철학이 담긴 부르탈리즘적인 건축물을 짓는 과정이 담긴 영화이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항상 그렇듯이 '예술'은 서포트를 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어야 더 빛나는(?) 것으로, 사업가 해리슨의 제안으로 지역사회에 남길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컴뮤니센터(도서관, 극장, 체육관, 예배당)를 짓기로 하지만,  늘상 돈 줄을 잡고 있는 '물주'는 투자자로서 현실적인 껄끄러운 소리를 내고 때로는 슬그머니 무례하고,  무시하고, 얼굴이 없는 짓을 한다는 것이다. 천재 건축가의 앞서가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건축 설계는 주위의 일반적인 사람들과 불협 화음으로 삐걱거린다. '창의적'이란 기존의 것을 부수는 나오는 새로운 것이기에 치루어야 할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고통'과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약'을 하고야 마는 우리의 천재 건축가님!

영화 상영 시간이 무려 215분으로, 중간에 15분 '인터미션'이 있었던 영화로 기억 남을 것 같다. 감독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 어려웠다.  건축 양식으로서 영화 제목 보다는 ' 누가 부르털리스트인가' 하는 물음을 'brutal'(잔인한, 야만적, 동물을 닮은)이란 단어와 함께 생각해 보았다. 

영화가 주인공의 삶을 전기적인 전개로 하다보니 '실화'인가 싶었는데 '허구'라고 한다. 

Saturday, March 15, 2025

FireFly

 https://www.youtube.com/watch?v=qh55_mIidz8

나는 반딧불, 황가람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몰랐어요 내가 난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