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다
해가 있는 시간에 공원을 걷다보니 밤시간과 다르게 나무들의 겨울나기가 눈에 훤하게 들어온다. 추운 겨울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각 각양각색의 패턴으로 겉껍질을 너덜너덜하게 벗겨내며 견디고 있는(?) 플라타너스의 겨울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옷을 벗으며 견디는 것일까.
눈을 들어 오래된 플라타너스를 올려 보았다. 나무의 오래된 밑둥은 피부가 너덜거리지만 하늘로 향한 가지들은 단단하고 하얀 속살로 매끈하다. 북아메리카에서(1910년경) 건너와서 속살이 하얀가? 가로수로 심겨진 나무들이 일명 '닭발'처럼 싹뚝싹뚝 가혹한 가지치기를 당하는지금, 다행히 공원의 나무는 키를 높이고 가지를 넓혀 '우람하게' 서있는 것 아닌가.
나에게 있어 '플라타너스'는 어린시절 초등학교 뒷뜰에 웅대하게 서있던 키큰 나무로 '혐오'의 느낌을 함께하는 어린 기억에서 시작된다. 털이 많고 꿈틀거리는 벌레(쐐기)가 떨어져 따끔거리고 쓰라린 아픔을 주었기에 나무들이 만든 푸른 그늘 아래 가는 것이 두려움이었다. 한편으로는 탁구공만한 크기의 동그란 방울 열매가 달려있는 모습이 어린 시절 나에게는 신기하게 다가오기도 했던 것 같다.
나무이파리가 유난히도 커다랗고, 커다란 갈색 나뭇잎을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가을의 소리를 주는 나무는 플라타너스 나무(platanus)양버즘나무) 이름은 '넓다'는 뜻의 그리스어 platy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나무의 껍질이 얼룩덜룩하게 벗겨진 모양이 마치 버짐(버즘)핀 것 같아 버짐나무로 불리며, 우리나라의 대부분은 '양버즘나무'라고 한다.
공기 정화 능력이 탁월하고, 성장 속도가 빠르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자라고, 병충해에 잘 견디고, 추위에도 강한 여러 조건들은 가로수로 적격이었을 것이다. 점점 심각해지는 대기오염을 정화시키는 나무이지만 도시 안전을 위해(전선), 상가들의 간판보호 등등의 이유로 닭발 가로수 치기를 행하는모습을 종종 본다. 심지어 아파트 주변의 오래된 장성한 나무들까지 싹뚝싹뚝 심한 가지치기를 당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동네 공원에 자꾸만 '묵은 껍질'을 벗겨내며 견디며 서있는 나이 많은 우람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있다. 김현승 시인의 '플라타너스'란 시를 적어본다.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음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며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출처: 문예,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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