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Yes
22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슬픔의 삼각형'이란 블랙 코미디를 보고 나서 한 문장으로 말해야 한다면 '오직 예스!'라고 하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평등을 외치지만 불평등(not equal)이 있는 굳건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개인적인 경험은 말한다. 이 영화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못 가졌다 다 가진자의 계층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열심히 부를 축적해서 이룩해낸, 가장 강력한 돈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 타고난 미모와 긴 다리의 육체의 힘을 가진 사람들, 돈의 권력에 '에스'라고만 답하고 비위 맞추며, 아랫 사람을 매정하게 부리는 중간층의 사람들, 몸고생 마음 고생하며 컴컴한 지하 현실을 견디는 유령같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이야기다. 갑과 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우리는 갑이 되기 위해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발버둥을 치며 아둥바둥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힘을 갖고 있는 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을의 생각을 상관하거나 묻지 않고 때로는 친절하게(?) 오만한(?) 자비를 베푼다. 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갑에게 쉽게 말하지 않는다. 친절과 배려로 최대한의 써비스를 제공하여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어 먹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서 중노동을 맡은 존재감 없는 유령사람들은 입 다물고 몸을 움직여 묵묵히 일을 해야만 한다. 호화 여객선엔 술에 찌든 선장과 상류층의 부유한 승객들, 미끈한 승무원들, 막일을 맡은 노동자들이 함께 한다. 그런데 해적에게 수류탄 공격을 받고 배가 침몰하였다.
호화 여객선이 침몰하여 무인도에 살아 남은 사람들의 새롭게 형성된 갑과 을의 계층관계는 흥미로웠다. 무인도에서 생존 능력 즉 먹이와 불을 피울 줄 아는 사람이 힘을 갖게 되고, 가장 하류계층이라 여겼던 사람에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게 되었을 때의 해프닝은 신선한 자극과 몰입을 가져왔다. 새로운 권력자가 자신의 정체감을 묻는다. "내가 누구라고? 캡틴!" 존재감 일도 없었던 사람에게 살아남기 위해 순종하고 복종한다. 남자친구를 새로운 권력녀에게 공유 형태로 뺏겨도 프리젤 과자 한 봉지는 먹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무인도가 리조트 섬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새 권력자가가 '아는 맛'의 달콤한 권력을 내려놓고, 밑바닥 삶의 터로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 상상해 본다. 달콤한 권력을 내려 놓아야 할 위기에 당면한 권력자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화는 열린 결말을 주고 끝나 버렸다. 상상은 내몫이란다. 좋게 좋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그리 좋은 결말이 날 것 같지 않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하질 않는가. 그것도 '결핍'된 상태에서 획득한 권력이니 쉽게 내려 놓지 못하고 발버둥치다 얼마 못가 불행한 결과를 맞이할 것 같다.
어쨋든,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는데, 인상 쓰면 양미간에 생기는 감정 주름을 뜻한다고 한다. 영화에 의하면, 명품의 모델들이 인상 팍 쓰고 세상 건방진 표정은 훈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눈 내리깔고 '너희가 명품 맛을 알어?' 이런 시건방진 태도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상품 모델의 표정은 친화적이고 미소짓는 얼굴 표정을 번갈아 표현하는 장면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블랙 코메디 영화이다.)
어느덧 양미간에 인상주름, 내천자가 깊어진다. 양미간에 인상주름를 제거해야 할까? 살면서 얻은 주름인데 부끄러운가? 감정이 흔적을 남긴 것이 부끄러운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면, 아니 생존과 관련된 일이라면 주름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굴로 생존하는 삶의 스타일을 꾸리지 않고 사는 것이 감사하다. 자신의 주름은 자신이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역사가 있는 내 얼굴 부끄럽지 않게 책임지고 살아본다.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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