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대략 이주일 동안 약을 몸안으로 집어 넣었다. '간'에 무리가 가지 않냐고 약사샘에게 문의를 드렸더니 '물'을 더 많이 마시라고 조언을 주신다. 지난 여름 시원한 에어컨을 틀고 자다 냉방병에 걸려 고생한 끝에 나름 찬바람에 대한 예의를 알게 되었는데도, 나의 예의가 부족했던지 많은 양의 티슈가 필요하다. 겨울 찬바람에 '알러지'란 말에 저항하지 않고 다시 약을 먹으며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만다.
부드럽고 하얀 티슈에 묻어 나오는 콧물은 멈출 것 같지 않은 기세에 '신기함'이란 단어를 나의 사전에 기록한다. 훌쩍거리며 목안으로 넘기면 가래가 되어 기침을 하게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에 아무리 '부드러운 티슈'를 사용한다고해도 코끝 주변이 붉어진다. 약없이 자연치유 어쩌고 저쩌고를 포기하고 지금 여기의 나는 '겸손하게' '얼른' 병원에 가는 것이 마땅하다. 완치는 아니지만 오늘부터는 '약'을 정지할 생각이다. '잠'을 충분히 자고 외출시 마스크를 사용하고 음식을 골고루 먹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으면 몸이 차차 회복할 것이다.
새해 첫 주말동안 눈이 내렸다. 온도가 떨어지면 빙판 길이 될 것이 명확하기에 서둘러 날이 밝은 시간에 동네 공원으로 나갔다. 뿌드득뿌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즐겁고 행복하다. 물론 추위에 대한 완전무장을 하고 나간지라 껴입은 만큼 발걸음이 둔하다. 마스크에서 올라오는 뜨듯한 열기에 안경 렌즈가 뿌여졌다 맑았다를 반복해도, 행여 눈길에 넘어질까 두려움이 앞서도 뿌드득거리는 눈이 쌓인 거리를 걷는 일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아이젠을 신발 밑에 신고 나올 것을, 등산용 스틱을 가지고 나올 것을......두려움이 즐거움에 앞선 것은 사실이다. 일부러 챙겨신고 나간 발목있는 등산화는 새것이라 아직 적응이 안된 상태이다. 눈이 치워지지 않는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눈사람을만들기 위해 나온 젊은 부부를 몇팀 보았다. 운동장의 흙이 섞인 누런 눈사람은 동화처럼 예쁘지 않았지만 함께 눈사람을 만드는 젊은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보며 두 아이들과의 젊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눈내리는 날은 손수 차를 운전해야만 통행이 가능했던 터라, 긴장되는 날이었다. 자기 집 드라이브 웨이의 눈을 치우는 것이 법으로 정해진 일인지라 이웃들의 눈치우는 소리가 가득했었다. 아들들이 드라이브 웨이에서 삽을 들고 눈을 치우던 소리, 눈싸움을 하던 소리, 못난 눈사람의 모습..... 습기를 머금은 눈을 삽을 들고치우는 일은 땀이 나는 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비상용으로 눈을 녹이는 염화칼슘을 구입해 저장해 놓기도 하였다.
지금 여기의 거리는 눈을 왜 치우지 않은 것일까? 알아서들 눈오는 날이면 움직이지 않고 집에 있으면 되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주말이라 시스템이 쉬고 있는 중인가. 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돌아다니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야회활동을 서둘러 마치고 푹신한 쇼파에 앉아서 '돈워리'란 영화를 보았다. '호와킨 피닉스'가 실존인물인 '존 캘러핸'(John Callahan)역을 맡아 열연을 한다. 누구나 삶속엔 '결핍'이란 단어가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이기에, 고통을 잊고자 선택한 '술 중독'을 이해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들로 인한 더 악화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찌하겠는가. 자신이 주어진 삶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밖에 없는 고독한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중요한 것을 새삼 깨닫게 된 영화이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못난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안내해 준 좋은 사람.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은 누구나 필요할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과거의 상처들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잊고 놓아주어야 한다. 못난 선택을 내렸던 나를 용서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겠지만 잊어야 한다.
'존 캘러핸'의 'Don't worry, He Won't Get Far on Fo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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