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시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천천히 읽고 있는 중이다.
광주, 도청, 분수대, 정거장, 궁전 제과, 삼양 백화점, 서점, 우체국, 학생회관, 전남대, 여고 1학년, 가사 시간, 최루탄 소리, 흰연기, 화순 너릿재, 화순 고속 터미날, 개구리 울음소리, 총소리, 국어 선생님, 사라진 선생님, 사라진 사람들, 용달차에 올라탄 사람들, 담요, 피난, 리어카를 끌고 가는 행렬......오늘 아침 떠오른 나의 단어들이다.
여고 1학년 5월이었다. 전남대가 내려다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최루탄의 소리와 희뿌연 연기에 익숙한 시간이었다. 가사 시간의 실습으로 생강맛이 나는 맛있는 '매작과'를 만들다 갑작스럽게 수업을 파하고 하교를 하였다.
밤에 우리 가족은 불을 끄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을 대비했었다. 총소리가 커지자, 아버지의 지시대로 신속하게 가장 낮은 곳인 부엌으로 온가족이 모두 모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자식들을 광주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셨다. 날이 밝자 교통 수단이 끊긴 광주를 벗어나기 위해, 다음날 아버지와 함께 어린 우리들은 화순 너릿재를 넘어 버스가 다니는 화순 버스 터미날까지 걷고 걸었다. 엄마 아버지만 집에 남고 자식들은 모두 집을 비웠던 것이다. 6.25 전쟁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람들이 짐을 꾸려 길을 걷고 걸어갔다.
동생들을 데리고 시골 친척집에 도착했을 시간은 어두웠고, 개구리가 논에서 한참이나 따발총처럼 울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지만,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들과 어울려 이상한 계엄령을 선포하고도 뻔뻔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은 이상한 시간이다.
0 Comments:
Post a Comment
<<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