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수요일
비 오는 수요일이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서를 내었고 마침내 오후에 최종 서류 절차를 하러 학교에 가게 되었다. 삶이란 때로는 엉뚱한 방법으로 '길'을 만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심지어 나의 출현을 간절함으로 기다리는 곳에 취소 전화까지 해야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막연함과 두려움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시간이 결코 오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스스로 '쓰담쓰담' 해주고 싶다. 거절과 부정에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갔던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비가 오는 수요일이다. 어제는 봄날이었다. 학교에 피어있는 오래 묵은 하얀 목련은 선물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봄비가 어린 새싹들의 신록을 재촉할 것이다. 부정적이고 오래 묵은 생각들을 보내버리고 이제 봄의 시간이 온 것이다. 겨울의 인내가 없었다면 봄이 오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비가 오는 수요일이다. 오랜만에 봄코트를 입을까 벗었다 입었다를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가장 편안한 옷차림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의 몸무게를 견디는 튼튼한 등산화에 어울릴 수 있는 옷을 골라서 준비해뒀다. 살이 쪄서 정장 슈트 상의가 찡기는 감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라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옛날이 되어버린 미국시절, 미국 대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에 주눅들어 있을 때 당당한 여교수님이 나의 젊은 의상을 지적했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공식적으로 전문적으로 옷을 입어야지...옷이 젊다고 미국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 영어라서 아마 자의적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 에피소드이긴 하다.
전문직 여성으로서 입어야 할 옷이라? 작가가 작가답게 입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과 충돌이 있었다. 백화점에 나가 사무실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형식적인 옷을 구입하여 강의에 나갔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그때 입었던 옷들이 작아서 착용하기 어려운 지금이다.
아무래도 능숙하지 못한 영어실력이 핸디캡이 되어 미국 학생들에게 끌려 다닐 수 있었던 위험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든든한 위장의 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큰 목소리와 작가로서의 자신감 그리고 그동안의 교육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족한 점 많았지만 좌충우돌 함께 수업에 참여한 나의 미국 대학생들을 생각하면 난 운이 좋았고 충분히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새 직장에서 각오를 하자면, '역지사지' 입장 바꾸어 생각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타인을 자신보다 낫다고 여기고 귀히 여기고 겸손하자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까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성실함으로 겸손함으로 처음 시작하는 마음을 지킨다면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비오는 수요일 아침에 심어본다.
0 Comments:
Post a Comment
<<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