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03, 2019

Together

'함께(together)란 단어는 다정하지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서로가 각자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멋지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함께 있어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태도가 기본적인 기초를 갖고 있거나 혹은 시간의 축적만큼이나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넉넉함이 마련되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뒷담화를 실어 나르기를 즐겨하는 사람과의 식사와 커피는 피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무심하게 편안한 커피 한잔 하기가 쉽지가 않다! )

'그럴 수도 있지', '그러려니', '괜찮아' 등등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단어들이 없다면 어찌 미묘하고도 애매한 감정을 정리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한다. 그러나 이런 무심한 단어들은 술처럼 취하게 하여 무기력하게 쓰러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자꾸만 수용하고 용인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살다보면 어떻게 되는거지?


'여름과 가을의 공존'이란 단어를 아침신문에서 보았다. 애매하고 모호한 것은 아름답지만 복잡할 때가 있다. 선명한 것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것 아니겠는가. 나무들은 아직 푸르고 서늘한 시간을 따른 꽃들은 치열하게 꽃들을 들어 올리며  9월이라는 시간에 접어 들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나의 시간은 6년이란 숫자를 축적하였다. 돌아보면 보잘 것 없고 남루한 기억이 쌓여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원하지 않는 삶이었다. 지금 여기서 진정 내가 꾸린 삶의 모습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마음 편해지는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돌아보면, 6년의 시간은 사라졌다! 65세를 노인으로 칭한다면 아직 중년의 시간이 있다. 앞으로의 시간을 가을 꽃처럼 최선을 다해 피워내야 할 것이라고 마음밭을 다져보기로 한다.

내 삶의 마지막 날에 갖게 될 단어는 무엇일까? 나 또한 남들처럼 마지막 날을 별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냥 잊고 살고 싶은 멀리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가을이니까 물어본다.



내 삶을 함께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삶의 결이 더 풍부해지고 깊이가 깊어지고, 더 단단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음을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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