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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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북'이란 유색인종을 차별하여 만든 여행을 할 때 참고해야 할 주유소와 모텔 그리고 식당등을 소개한 책이름이다. 미국의 1960년대, 화이트 칼라, 즉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흑인 천재 예술가가 견뎌야 했던 차별과 모욕을 그의 운전사 이탈리아 백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로 영화가 진행되었다.

'다양성'이란 풍부한 에너지가 긍정적으로 발휘되지 않고, 사회전반적으로 획일화 되고 주체적인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운명처럼 받아 들이고 신앙의 힘으로 그 인간존중의 기본권리를 받지 못함으로 생기는 상처와 분노를 다스려야 했을 것이며, 때로는 술과 마약으로 그 통증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상식이하의 대접을 받으면 누구나 감정적인 분노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움틀거리는 그 불쾌하고 불행한 감정을 어떻게 다루며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는 주먹을 휘두르고, 누군가는 예술로 승화시키고,  누군가는 나무를 심을 것이다.

감정적인 이탈리안 백인 운전사는 쉽게 흥분하며 나름 타고난 넉살과 주먹질로 사회와 소통한다. 그것에 반하여 흑인 피아니스트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적인 캐릭터로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흑인의 아픔을 다스린다.  위엄있게 자신이 처해있는 불합리적 대우를 개선해 달라고 말할 수 있고 서로가 공감하고 소통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이런 영화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말로 되지 않으면 주먹이 나온다는 말이 때로는 어쩔 수 없게 선택될 수 밖에 없다. 주먹을 날려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흑인 예술가는 감정적인 주먹 보다는 위엄있는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 유학시절에서 만났던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미국 사람들은 1960년대의 인종차별이 만연한 그 시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검은 피부색을 지닌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나라였으며, 이웃 동네의 흑인은 능력있고 이쁜 백인 아내를 두었으며, 테니스 백인 코치는 아름다운 흑인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정스럽고 부드러운 흑인 교수님의 환한 미소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있다.  지금 이시간에도 알게 모르게 끼리 끼리 구별하고 차별하는 문화가 없다고는 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만난 미국 사회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 듯 하였다.

한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의 사회는 어떠한가.

같은 색의 피부와 머리를 가진 여기 사람들 또한 구별하고 차별하며 살아간다.  여성들의 권위가 적지 않게 상승되어 가는 것을 피부로 느껴질 때도 있다.  사회전반적으로 남녀 평등한 구조로 나아가려는 노력들을 하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뿌리박힌 구조적 문제들을 쉽게 상호협의적으로 풀어나가는 데있어,  어쩔 수 없는 진통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래 살다보면 다수를 위한 선택들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에 따른 소수들의 불편함을 보완수정 해야 할 것이다. 모두다 행복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하늘 아래 건설할 수 없겠지만 부족한 결핍을 보완수정해 나가는 과정은 의미있고 아름다운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때로는 선진국이 부러운 것은 인간존중에 대한 예의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똑 같지만서도 구조적으로 시스템을 잘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신발을 바꿔신어 보지 않고는 상대방의 고통을 알 수 없다는 말은 언제나 옳았던 것 같다. 영화 '그린북'을 보고나서 한 단어로 감상을 축약하라고 한다면 '디그니티'란 단어로 답하고 싶다. 위엄있는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잠시 물어보고 싶다. 오늘은 아파트 뒷산을 가볼까 한다.  꿋꿋이 서 있는 소나무들과 사이좋게 함께 살아가는 숲속 다양한 식물들을 보면서 답을 찾을 수 있는 행운이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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