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8, 2017

Creatively and Gracefully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인연을 맺고 또 오랫동안 친구의 이름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시간의 필터를 지나 보석처럼 남은 사람과 함께한 오늘은 보통의 여인처럼(?) 백화점 진열대에 머리를 숙이기도 하고, 주머니가 얇아 선뜻 구입할 수 없지만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책임지기 어려운 고급짐을 잠시 구경을 하였다.  서로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사람과의 수다는 행복하다.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랑하라'란 푸른 글귀가 봄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Sing like you don't need the money
Love like you'll never get hurt
you got to dance like nobody's watching

'알프레드 디 수자(?)'님의 글이라 알고 있었는데 아니라는 글들이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지 싶다. 작가미상의 글을 수자님이 소개한 것을 번역해 오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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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동안 꽃을 들어올리지 않던 '군자란'이 드디어 꽃대를 아기발톱 처럼 올리더니 9송이의 조황색 나팔을 수줍은 듯 햇살을 향해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바라보는 마음에 따스한 번짐을 주는 것 분명하다. 오래묵은 친구에게 우리집 군자란 이야기를 하니 친구의 꽃도 오랫동안 꽃을 보이지 않아 협박아닌 협박을 하였다한다. 나 또한 무심하게 이파리만 무성한 남자같은 군자란에게 물을 주며 '너도 양심이 있으면 꽃을 좀 피거라'하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물을 주러 가는 길에 그 한번도 본적 없는 현상에 눈을 비벼야 했다. 아니 진정 이것이 꽃을 올리고 있단 말인가! 드디어 때가 되었단 말인가! 어찌 물주며 바라보는 이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단 말인가!오래묵은 친구는 군자란에게 뽑아 없애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드란다. ㅋㅋㅋ그랬더니 자신의 꽃도 꽃대를 올리고 있는 중이라며 한참이나 사람 말을 알아먹는 꽃이야기 하느라 웃음꽃을 피웠다.

4년이란 숫자가 다 채워져가는 시간속에 나름 적응한다며 꽃을 피우기 보다는 적응하느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삶에도 내 정원의 군자란 처럼 9송이 꽃을 들어올릴 수 있을것인가 하는 생각이 덩달아 피어 오른다. 분갈이를 해주라는 친구의 말을 붙자와 꽃이 지고나면 더 넓은 영토를 허락해 주어야 할 꽃피울 숙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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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으로 살고 멋지게 죽기!
이번주에 방송에서 들었던 말중에 씨앗으로 가장 품고 싶은 말이었지 싶다. 시작과 끝사이에 펼쳐지고 있는 날마다의 삶이야기를 어떻게 채워 나가고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예술가로서 경계에 선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작품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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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의 이야기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한쪽 눈으로만 보는 외눈박이가 괴물로 나타나는 현상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어리석기에 때때로 보고싶은 것만 보기 쉽다. 예를 들면 물가에서 쉽게 동화될 수 없는 낯설음과 불편함을 당해본 사람은 이미 먼저와 적응하며 그곳에 자리잡고 누리는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악의없는 행동(그들만의 굳건한 단결력)과 언행(끼리끼리의 대화)에서 텃세를 느낄 수 있다는 그 느낌적인 느낌을 안다. 자리잡아 주고 밀어주고 땡겨주는 그들만의  일종의 행위들이 섞이지 못한자에게는 '텃세'라고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 처해 먼저 도달한 기득권들의 악의없는 행동들을 똑같이 당해보지 않으면 절대 쉽게 이해하며 배려할 수 없는 '텃세'라는 단어의 추함을 물가에서 보았다. 적응하지 못한 약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 그 불쾌함은 견디다보면 둔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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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라는 단어는 결코 쉽지 않은 정의와 실천을 품고 있는 듯하다. 배려? '역지사지'란 네글자로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각기 처해 있는 환경과 위치를 고려한다 할지라도 내 입장 보다 우선 할 수 없는 것이다. '배려'를 늘상 해줄 수는 없진 않는가! 이런 성급함과 인내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어 내뱉은 단어들은 불만과 불평으로 어둡고 무거운 무게를 안고 서로의 긍정적인 힘들을 파괴할 것이 분명하긴 하다. 그러나 파괴뒤에 창조가 있는 것을 기억하기로 한다.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 건강하게 다시 재정립하고 보완수정 들어갈 수 있는 관계가 건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사람을 보아가며 그 각각의 그릇의 용량을 보고 부정적인 단어들도 쏟을 수 있어야 한다. 내공이 필요한 부분으로 잘못 그 과정중에 깊게 패일 상처만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고도 생산적인 결과를 원한다할 지라도 잘못된 만남은 서로에게 상처만 줄 수 있다는 것 인정하기로 그냥 인정하며 마음을 비워버리기로 한다. 그래 너 잘났다~~후다닥 도망가는 것이다 후덜덜덜 무서워~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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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의 영화를 보면서 왜 '개스통'이 맘에 들지 않은지 '벨'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다. 키크고 잘생기고 춤도 잘추는 멋진 인간적인 냄새가 가득한 개스통이 왜 싫은 것인지 묻는 말씀에 개스통이 무식하고 마음밭이 시컴해서 싫은 것 아니냐고 답했다. 맘에 드는 여인을 취하기 위해 여인의 아버지 마저 희생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던 그 비인간성의 확장이 없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책을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사회성이 떨어지기도 하며 혼자 잘노는 이상한(?) '벨'은 현실적으로 인기있는 '개스통'에겐 관심이 없고 비록 포악한 짐승남이지만  드라마가 있고 혈통이 있는 야수의 희생정신에 거기에 좋아하는 책도 도서관처럼 소장한 야수의 지성과  공주성을 뒷바침할 풍부한 야수의 거부하기 힘든 물질성과 인기없는 외로운 짐승왕자를 사랑하게 된 모성애의 묘한 결합으로 꽃피우는 사랑이란 감정이 보인다.

결국  사랑의 힘으로  그 짐승남의 야수성과 기타 여러분의 사물화된 저주를 벗기고 꽃미남 왕자님과 온 인류를 구원하여 행복하게 되었다는 오래된 동화적인 프레임을 그대로 간직한  영화를 즐기기엔 자신이  판타지가 빠져나간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기도 하였다. '멍때리기'로 좋은 영화였다며 (멍 때리기를 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나?) 내안의 잊혀진 판타지의 끝자락을 애써 끄집어내어 보기로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ySrE0Kg6k
Beauty and 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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