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04, 2024

가리개

 날이 꾸물꾸물 비가 올 것 같은 날은 베란다 정리를 하기 좋은 날이다. 베란다를 구조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원목 삼단장을 베란다에 내놓자니 햇살에 탈색되고 온도차로 인해 상할 것이 예상되지만 할 수 없다. 급하게 가지고 있던 천을 바느질 없이 뚝딱 옷삔으로 폭과 길이를 맞춰 대충 가리개를 만들었다. 옷삔으로라도 어찌저찌 상황에 맞게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수십년 전 내게도 재봉틀이 있었다. 아이들이 한참 어렸을 때 아기가 잠들고 있는 시간에 재봉틀을 셀프로 연습하며 다룬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앞치마 하나도 만들 기회조차 갖지 못한 재봉틀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다른 사람이 빌려가서,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은 재봉틀로 기억남게 되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을 가려주는 가리개는 참 좋다.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필요했고, 지금도 필요하지만 훤히 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가려주는 가리개. 오래된 사진 속 어리고 풋풋한 얼굴들은 웃고 있지만 시간과 함께 퇴색된 우정을 끄집어내어 온기를 애써 불어넣고 살고 싶지는 않다. 우정은 영원하지 않고 사람은 변한다는 사실은 오늘 아침 맞는 말이다. 가리개가 필요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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